교육은 사회를 바꿀수 있는가

한국어판 서문

내 경력을 통틀어서, 나는 크게 두 개의 프로젝트에 관여해왔다. 첫째는 학교 안팎에서 진행되는 교육이 사회의 지배-종속관계의 재생산에 관여하는 복잡한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회의 불평등을 막는데 이용할 수 있는 모순들, 가능성들, 그리고 현실들에 주목함으로써 지배-종속 관계에 도전하는 것이다.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는 이러한 나의 두 개의 프로젝트의 연장선에 있다. (중략) 이러한 책들을 통해서 내가 의도한 바는 교육자들이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었다. "교육은 단지 지배관계를 반영하는가?" 그리고, "교육이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 가능한가?"
특별히 [미국 교육개혁 옳은 길로 가고 있나]에서 나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강력하게 답을 했다. 그렇지만 내가 고심했던 것은 "누가"그 변혁을 추진하는가라는 것이었다. 교육을 이용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나라들이 너무도 많다. 그 나라들에서 이 변혁을 추진한 사람들은 실제로는 사회를 불평등으로 이끄는 가치와 그를 반영한 정책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나는 이러한 사실 때문에 몹시 불편했다. 이제 나는 교육이 만약 경제, 정치, 문화 운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만 하다면, 교육은 사회 변혁에 있어서 강력한 힘이라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보여주었던 것은 이 힘이 지배 집단이 형성한 새로운 동맹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나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만약 지배 집단이 할 수 있다면, 진보 집단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는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경험적으로 한층 야심 찬 책이다. (중략) 나는 비판적인 교육자들이 사회적으로 변혁적인 운동에 참여할 때 직면할 수 있는 위험들에 대해서 아주 솔직해지고 싶다. 이러한 위험들은 매우 구체적이다. 실제로, 한국의 현 상황은 교사 및 학생을 위한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교육자들에 맞서 지배 집단이 행동하게 될 방식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교사들과 전교조와 같은 교사 조직에 대한 정부의 비윤리적인 공격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국에서 벌어진 한층 비판적인 민주적 교육을 위한 지속적인 투쟁에 관여했던 내 자신의 경험을 감안할 때, 최근에 가해지는 공격은 나에게 한결 개인적으로 다가온다. 이 때문에 나는 위험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익명성 뒤에 숨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가능성과 위험에 대한-더 중요하게는 억압적인 제도와 정책들에 맞선 투쟁들이 지속되는 승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례로서- 나 자신의 예화를 이용한다. 
(중략) 세월호 "참사"- 아마도 "살인들"이라는 단어가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는 왜 내가 이 책과 다른 곳에서 제기한 나의 주장들이 한국적 맥락에서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참사는 우리가 신자유주의와 우파적인 정책들이 만들어내는 끔찍한 결과들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해야 할 필요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이 참사는 우리가 더욱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반헤게모니 운동들을 조직하고 지키는 일을 반드시 지속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한 사회운동들은 한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운동들은 옛날에 그랬던 것만큼이나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교육은 그러한 운동을 조직하고 지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후략)


2014년 9월 
Michael W. Apple 


<목차> 
한국어판 서문 5
감사의 말 10
제1장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17
제2장 파울로 프레이리, 비판적 교육 연구자 및 활동가의 과제 61
제3장 조지 카운츠와 근본적 변혁의 정치학 103
제4장 듀 보이스와 우드슨, 변혁의 정치학 153
제5장 이미 이룬 변혁을 유지시키기?“저개발 세계”에서 배우다 195
제6장 미국을 월마트처럼 만들기?사회 변혁과 교육 실천 249
제7장 비판적 교육, 진실을 말하고 반격하기 267
제8장 질문에 답하기?교육과 사회 변혁 291
역자 해제
헤게모니, 유기적 지식인, 그리고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강희룡 321
참고 문헌 333

헤게모니, 유기적 지식인, 그리고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 2014년 8월15일 마이클 애플 교수 초청 공동심포지엄 준비위원회 workshop 자료


강희룡 |  경기교육연구원, 마이클 애플 교수 초청 공동심포지엄 준비위원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번역자

1.애플과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이 책은 마이클 애플이 자신의 학문적/활동가적 여정을 결산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책이다. 애플이 책의 제목으로 삼으면서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이 질문은 1980년대의 민주화 과정을 겪은 우리에게, 특히, 여러 가지 모습으로 교육에 관여하고 있는 한국의 교육자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질문이다.
“사회과학”이나 “객관적 조건” 등의 수사에 주눅이 들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질문은 그다지 의미 있는 질문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국가를 부르조아의 집행기구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학교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경제결정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은 경제적-물적토대의 종속변수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에게 “교육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는 몽상에 지나지 않거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공격받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애플이 던지는 이 질문은 그렇게 단순하게 매도해 버릴 수 없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삶과 그가 교육 통해서 사회에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이 질문이 온전히 담아 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마이클 애플은 독특한 교육사를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 “붉은 기저귀를 찬 아기”라는 표현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애플은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가정에서 태어났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모택동주의자로 불리정도로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로 자처했다. 미국에서 공산주의자로 산다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이러한 가정적 배경은 애플로 하여금 넉넉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물론, 대학 진학도 그에게는 옵션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대학을 마치고 박사학위까지 마치게 된 데는 애플이 성장한 시대적 배경이 녹아 있었고, 그의 그러한 독특한 교육사는 그가 세상에 펼쳐보이게 되는 “교육에 대한 신뢰”의 원천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고등학교를 일찍 마치고 인쇄공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 일찍 마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인쇄공시절의 그의 나이는 15-16세였다. 동시에 야간 대학을 다닌다. 그런데, 그가 다닌 야간 대학은 전혀 흥미롭지 않은 곳이었다. 그의 표현으로는 뉴저지주 Perterson에 있는 초등학교 건물, 낡아 빠지고 흙먼지 나는 곳에서 대규모의 강좌가 아주 지루하게 열리고 있었다. 그는 일년 만에 그곳을 그만두고 군에 입대하게 된다. 군대에서 그는 두가지 일을 맡았는데, 하나는 운전병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관”이었다. 그는 취사도구(기계)를 조정했으며 응급처치법과 나침반 보는 법 등을 “교육”했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 “교육 경력”과 대학에서의 1년 교육이 그로 하여금 교사가 되게 하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는 1962년부터 1966년까지 “속성반 교사자격증(emergency certificate)”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교사가 된 후에는 4년제 대학(Glassboro State Univ.)을 다니게 되는데, 야간강좌를 수강했다. 교사가 된 이 시기에 애플은 반인종주의 운동에 깊이 관여를 했고, 교사노조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가 교사 경력을 끝마치고 학자의 길을 들어서게 된 것을 그는 “우연”이었다고 쓰고 있다. 그가 Peterson에서 Pitman으로 옮겨와서 6학년을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남북전쟁이후 흑인들의 해방이 이루어진 시기에도 오랫동안 자행되었던 흑인박해(lynch)를 가르쳤다. 그리고, 주제는 자연스레 흑인이 미국역사에서 자유를 위해 벌인 투쟁과 1960년대 중반(그가 이 주제를 가르치던 시기)의 시민인권운동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학부형 중의 한명이면서 그 지역의 목사였던 사람이 흑인에 대한 박해는 없었으며 애플의 수업이 날조라며 그를 파면하라고 학교 당국에 요구를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애플은 그의 표현을 빌자면 “보다 나은 교육과정을 만들고, 보다 좋은 것들을 학교에 가져오며, 교사들을 보다 존중하게 만들 방법을 찾기 위해”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게 된다. 결국 콜럼비아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그 이후로 그는 학자/활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2. 애플 사상의 기초: 관계적으로 생각하기

개인사
이러한 개인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애플과 같이 생각하고 그런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애플에게서만은 이러한 개인사가 삶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시종일관 관심을 두었던 것은 세상을 관계적으로 생각하기인데, 그 관계 속에는 본인이 보낸 유년 시절에 보았던 가족과 이웃들처럼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연대가 녹아 있다. 또한, 관계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관심 표명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운동을 조직해 나가고 사회를 바꾸어 나갈까로 그 생각은 확장된다.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를 관통하는 것도 바로 관계적으로 생각하기이다. 사회의 구조를 형성하는 지배적인 권력과 그 권력에 의해서 억압받는 사람들. 이 관계를 매개하는 교육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반대로 교육을 통해서 그러한 관계를 전복시키기 위한 기획들이 이 책을 관통하는 흐름이라 하겠다.

헤게모니
이 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애플의 생각을 관통하는 중요한 개념을 하나 짚고 넘어가보도록 하자. 그것은 헤게모니이다. 한국에서 교육운동을 해본 사람치고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헤게모니 장악”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애플은 이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관계적으로 생각”하는 바탕 위에서 파악한다.
헤게모니를 ‘장악’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할 때 그것은 파워라는 개념과 어떤 차별성을 가질까? 물론, 헤게모니는 연성(soft) 파워이며 ‘지적-도덕적 지도력’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헤게모니를 정말로 ‘지적-도덕적 지도력’이라고 이해해도 좋을까?
헤게모니가 ‘장악’할 수 있는 것으로 사용되는 예를 보자. 현재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보수세력이고, 이 보수세력은 정치권력으로 새누리당으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들은 새누리당이 행사하는 지적-도덕적 지도력에 동의를 표하는 것일까?
애플은 헤게모니를 하나의 순간(moment)로 이해한다. 그에게 있어 헤게모니는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을 일정한 기간 동안 형성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여기에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이데올로기인데,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헤게모니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aspect)로 이해된다.
애플이 제시하는 헤게모니 개념은 우산의 모형을 통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이 될 수 있다. 비가 올 때 우산은 요긴한 물건이다. 우산은 비가 맞지 않게 해주는 이익을 제공한다. 이 우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우산이 없는 사람에게 우산의 그늘을 제공할 수 있다. 물론, 우산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것은 우산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우산의 그늘을 누구에게 얼마만큼 제공할지 그리고 우산을 쥐고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우산의 소유자가 결정한다. 하지만,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이 우산 속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포함시키기 위해서는 우산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양보를 해야한다. 물론, 우산 속에 들어오는 정도는 우산 밖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결정되는 면이 있다. 어떤 사람은 머리만 디밀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한쪽 다리만 걸칠 수도 있다. 물론, 온전하게 우산의 그늘 아래로 들어올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산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우산 밖의 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적절히’ 수용하기만 하면 우산의 그늘로 몰려들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애플이 설명하는 헤게모니의 개념으로 우산의 메타포를 풀어보자. 애플은 헤게모니라는 순간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익이 되는 요소와 버려야 할 요소의 정치학(politics of element of goodsense and bad sense)이 작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 버려야할 요소는 제거하고 이익이 되는 요소를 제시할 때 헤게모니 블록(bloc)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우산의 메타포에서 우산 그늘은 바로 이익이 되는 요소에 해당한다. 우산의 그늘이 있다고만 해서 사람들이 우산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들에 대한 적절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우산이 가려고 하는 방향을 예로 든다면,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이 가려고 하는 방향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방향인 한에서 우산 밖에 있는 사람과 타협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는 우산에 들여 놓는 정도를 예로 들어보자. 몸의 일부분만 우산의 그늘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들에게는 부분적으로만 우산의 그늘을 제공해도 충분할 것이다.

3. 관계적으로 생각하기, 헤게모니, 그리고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나?]

가. 국가라는 기구는 우파만 이용할 수 있는 기구인가? 조지 카운츠; 제3장
이 글의 서두에서 필자는 학교교육의 한계에 대해서 8-90년대 학생운동의 시대를 거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접해 보았을 낯설지 않은 논리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는 “관계적으로 생각하기”를 통해서 검증이 필요한 논리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파가 국가를 자신들의 아젠다를 위해서 이용할 수 있다면, 진보도 이를 이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3장에서 다루고 있는 카운츠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다.
카운츠의 문제제기를 애플은 제3장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교육은 단지 지배 집단의 이데올로기적인 목적과 문화의 형식 및 내용을 재생산하고 있는가?
-학교 교육은 현존하는 사회들에 대한 중요한 이슈들에 문제제기를 하는데 사용될 수는 없는가?
-학교교육은 사회를 재조직함으로써 사회를 재구조화하는데 참여할 수는 없는가?
-독점자본의 힘에 맞서서 우리(학교/교육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카운츠가 제기한 질문은 독자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리고 학교는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한 핵심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학교의 변혁만으로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지역사회, 미디어, 그리고 가족을 학교와 연계시킬 때만이 진정한 변혁이 일어난다고 생각했는데, 애플은 카운츠의 이러한 생각이 그람시의 사상과 맟닿아 있다고 보았다.
학교의 기능에 대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자연스레 맞닥뜨리게 되는 논쟁이 있다. 그것은 교육의 중립성과 indoctrination에 대한 논쟁이다. 카운츠는 학교가 중립적이었던 적이 없고 정치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점에 있어서는 애플도 카운츠 못지 않게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애플은 학교가 가지는 중립성과 indoctrination에 대한 일부 진보교육자들의 몰이해가 지배권력 앞에서 학교/교육을 통해서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게 만드는 장본인이라고 지적한다.

나. 우파는 어떻게 승리하는가? 제5장
파워를 헤게모니로 이해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유익을 제공해 준다. 특히, 우파가 승리하는 이유를 경제적-물적 조건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가지는 단견을 극복하는데, 헤게모니적 관점은 탁월한 설명력을 제공해 준다.
[교육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나?]의 제6장은 애플이 ‘관계적으로 생각하기’라는 본인의 주제를 헤게모니의 관점으로 풀어내고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제6장은 월마트를 다루고 있는데, 월마트는 ‘교육’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 예로 제시된다. 실제로 교육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는데, 이 변화가 반드시 진보적이지만은 않다는 구체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다. 탈중심연합의 가능성: 포르토 알레그레(Porto Allegre, Brazil) 제6장
제5장이 학교를 통해 사회를 “우파”적으로 바꾸는데 사용된 헤게모니 전략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면 제6장은 학교를 통해 사회를 “좌파”적으로 바꾸는 사용된 헤게모니 전략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핵심이 되는 개념은 탈중심 연합(decentered unity)이다.
브르질의 포르토 알레그레의 진보적인 변화들을 가능케 한 것은 학교변혁이라는 단일한 변수로만 설명될 수 없다. 실제로, 그곳에서 진행되었던 교육민주화의 과정은 사회 전체의 민주화를 위한 기획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라. 세계를 관계적으로 보기/그리고 창조적으로 행동하기: 한국 제7장
애플은 유기적 지식인으로서 살아가고 행동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제7장에서 적고 있다. 애플이 제시한 한국에서의 경험에 대해서 그 당시를 경험했고, 또한 그 이후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의 독자에게는 그의 경험이 그리 영웅적이거나 “운동가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비교적 “안전한” 사회에서 살던 그가 안기부 요원이라는 형태로 독재권력과 직접 마주했던 경험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그가 한국의 경험을 통해서 설파하고자 하는 내용은 유기적 지식인의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예시이다. 그는 우리 모두가 영웅적인 전사가 될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은 것 같아 보이면서도 “관계적으로 생각하기”를 통해서 수행할 수 있는 지식인들의 역할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예로, 애플은 한국을 방문한 후에 자신과 자신의 학생들의 모임인 금요세미나(Friday Seminar)주축이 되어 벌였던 전교조지지 운동을 소개하고 있다. 전교조에 대한지지 활동 뿐 아니라 애플은 유기적 지식인이 관여할 수 있는 행동의 예로 금요세미나가 관여한 여러 가지 활동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제7장의 후반부에 나와 있다.

마. 진보적인 교육전통에 발딛고 서기
애플은 이 책에서 카운츠 외에도 프레이리, 듀보이스, 우드슨 등의 진보적인 교육을 추구했던 사상가들을 소개하고 있다. 애플은 이들을 다루는 이유를 그들을 추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오히려, “우리가 디디고 설 어깨를 빌려준 사람들, 그리고 교육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의 거대한 강줄기가 살아 숨쉴 수 있도록 그렇게 오랫동안 혼신의 힘을 다한 사람들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 이들을 소개한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교육이 왜 정치투쟁의 중심에 서 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제목으로 던져진 질문[교육은 사회를 변혁할 수 있나?]라는 질문에 대해서 “공공 지식인”이 관여해야 할 영역을 제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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