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자전적 인터뷰

* 2001년 2월 26일 전교조 참교육연구소 등이 후원하고 진보교육연구소와 교육비평이 주관한 행사인 <마이클 애플 초청 강연회> 자료집 “마이클 애플과 한국교육운동의 만남-세계화시대의 한국교육개혁과 진보적 교육운동의 길찾기” 에 수록한 번역글


교육, 권력, 그리고 나의 삶



서문

다음의 인터뷰 내용은 원래 1990년에 출판되었으며, 가볍게 기획된 나에 대한 인터뷰이다. 이 인터뷰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이론가이면서 동시에 활동가인 두 사람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그 두 사람이란 인터뷰 당시에는 Alberta대학에 있었고, 지금은 UCLA에 재직하고 있는 Carlos Torres와 현재 Alberta대학에 있는 Raymond Morrow이다. 내가 이 책의 도입부분에 언급하였듯이, 나는 이론을 삶의 실제와 관련시킬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론가들이 “현 사회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 정치적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인 면에서의 - 주장의 근거를 구체적인 삶의 실제적 모습과 관련하여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것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쓸 때 그 중의 몇 가지를 시도하고자 하였다. 결국 나는 마침내 부분적으로 대화형식을 띤 인터뷰가 가장 좋은 방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첫째, 인터뷰의 내용은 내가 이 책의 앞의 두 장에 걸쳐서 이야기했던 것을 개인적 차원에서 다시 표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인터뷰에 참여했을 때에는 언어적 방벽 뒤로 숨기 힘들어지며 진실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게 된다. 둘째, 어떤 이들과의 대화는 더욱 더 직접적이며, 더욱 더 상호적인, 감각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과 역동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 셋째,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문제로 환원시킬(그리고 이는 매우 위험하다)때, 인터뷰는 여러 문제들의 다른 수준의 문제들을 포괄하면서 논의할 수 있도록 해준다. 결국 실천, 정치, 생애사, 그리고 이론들은 함께 섞일 수 있는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인터뷰의 원리는 과학적 영역에 속하면서 그것이 있는지조차 모르면서도 개인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검열 기제를 제거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 검열기제는 개인의 대답하기, 글쓰기, 질문하기의 행위들을 전문가의 소견이라는 틀을 통하여 제한하게 되며, 단지 개인의 것을 오직 하찮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한다.”고 인터뷰 형식이 가진 장점들을 지적한다. 학문적으로 고상한 취향이나 학문적 관례상의 특성은 개인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숨기게 한다’는 기본 명제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나는 학문적 관례나 학문적 고상함을 과도하게 추종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글을 교육에서의 문화와 권력의 실제적 관계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 할당했었다. 일반적으로 교육자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이라는 개념은 불완전할 뿐만이 아니라 <과학>을 빙자하여 무비판적인 경우가 많다. 부르디외는 나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다소간 <과학>적으로 여겨지는 사회과학의 여전히 모델을 유지하고자 하면서, 권력과 지식간의 관계를 보다 실제적인 상황을 통하여 연결시켰다. 주류의 학문적 취향은 저자와 독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을 가로막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인터뷰 양식에서도 여전히 많은 것들이 은폐될 수 있다. 즉, 사람들은 인터뷰가 이루어 질 때에도 언제나 가장 관례적인 방식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도 개인의 행동의 의미나 이유, 그리고 특정한 방식이 종종 선택되거나 배제되는 잠재적이며 무의식적인 메커니즘을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능력이 나에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음의 내용은 이미 나 자신에 의해서 재구성되고 재반영된 논의 내용들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며, 독자들 나름의 관점에서 분명히 재맥락화되고 재구성되었으면 한다.

나는 이 책(Official Knowledge)을 나의 아들 Paul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나에 대한 개인적 진술인 이 인터뷰로 마무리하려 한다. 이 두 이야기는 사람들의 실제 삶에 의해서 제한당하거나(지배) 사람들의 삶을 제한(피지배)하는 (지배/피지배) 구조에 대한 재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공식적 지식의 정치학-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과정에서의 우리의 도덕적/교육적인 책임감-이 시작되고 종결되고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공간인 것이다. 



인터뷰 



모로우: 오늘날 우리의 목적 중 하나는 미국사회와 다른 상황에 놓여 있는 캐나다 학생에게 교육에서의 문화 정치학에 대해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애플이 미국 교육학계에서 여러 다른 이름 즉, 근본적, 비판적 이론 등으로 불렸던 새로운 조류의 대표적 선봉자라는 사실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미국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는 이전의 비판 이론의 흐름과 일정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가 묻고 싶은 첫 번째 질문은 “교육에서의 당신의 연구․활동의 기원은 무엇인가?”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과 교육과 관련한 문제에 관한 미국 사회의 경향에 대해 상세히 반론을 제기하는 당신의 이론적 연구 내용의 전개 양상은 어떠한가?”에 대해서입니다.


애플: 모로우씨의 생각대로, 그런 문제는 내 생애사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나는 기묘한 인생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수년동안 인쇄공과 트럭 기사로서 일하면서 야간 고등학교에 다녔었습니다. 나는 노동자계급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가족에서 태어났으며, 매우 가난하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좀더 높은 교육을 받는데 필요한 돈이 내게 있는가가 의문이었습니다. 물론 실상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돈을 벌었습니다. 나는 군대에 가기 전가지 낮에는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두 곳의 작은 주의 사범대학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는 별로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는 군대에 갔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에 가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욱 쉬워 보였습니다. 군대에서 저는 교육 관련 업무을 하였습니다. 저는 나침반을 읽는 방법과 응급 처치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제대 이후 저는 1년간의 대학과정 이수를 인정 받았습니다. 당시 뉴저지의 도시 지역 내의 학교는 심각한 교사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특히 소수민족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에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나는 군대에서 가르쳐 본 적이 있었고 ‘코모 에스타(¿como esta?)’라는 말 정도는 할 수 있었습니다. 뉴저지의 페터슨(Paterson)이란 곳에 위치한 학교의 교단에 서게 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떠돌이(floater)"라고 불리는 19살짜리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전임 강사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매일아침 6시 45분에 나는 내가 어떤 학교에 있는지를 실감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페터슨의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히스페닉계 미국인들 사회 안에서 매우 활동적이었다는 이유로 거의 모든 시간을 유색인 학생들로 이루어진 과밀학교를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또한 당시에 나는 ‘인종 평등 위원회’(CORE) 페터슨 지부의 창립 발기인 중 한 사람이었으며, 그리고 나는 이미 문해 교육 사업과 미연방의 인종차별 철폐 운동에 관계된 활동에서 유용한 결실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흑인학교를 없애버리거나 또는 흑인 어린이들과 백인 어린이들을 같은 학교에 보내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종차별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들은 백인과 흑인의 수를 평준화하기 위하여 만든 기만적이고도 강제적인 정책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며, 그리고 우리 중의 상당수가 수감되었습니다. 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을 위한 문해교육 학교를 다시 개교하는 것을 주장하고 돕기 위해서 그곳에 갔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당시에 그러한 활동을 하는 가운데 교육자로서 정치의식화 되었습니다. 나는 비록 당시까지 실제적인 교사 교육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미국에서의 정치적, 문화적 교육적 투쟁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나 자신의 이론은 문해교육과 교육기회 등의 평등을 꾀하는 정치적 문제에 대한 급진적 충돌의 과정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는 제가 특정한 방향으로 방향전환을 한 이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점입니다. 젊은 시절 정치투쟁 경험이 그 뒤의 제 교육학 이론에 큰 영향을 주였습니다.



모로우: 그런 일들은 60년대 중반의 일들입니까?


애플: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까지의 일들입니다. 제가 1962년에 제대를 했으니까요.

모로우: 당신은 강력한 운동 전선의 모든 과정 중 가장 근본적인 공간에서 활동했었군요.



애플: 그렇지요. 종전운동 바로 직전의 일들입니다. 제가 뉴저지에서 교직에 있을 때, 저는 제가 관여하고 있는 이러한 종류의 투쟁이 확산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러한 일들이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패터슨이라는 장소의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패터슨은 미국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지역중의 하나였습니다. 현재는 일부의 자원 봉사자들과 자신들의 만족할만한 경제적 권리를 거의 가지지 못하는 80%의 (이른바)소수자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나는 유색인종들이 전세계적으로 볼 때에는 수적으로 다수이면서 사회적으로는 “소수자”이기 때문에 “소수자”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소수자라는 단어 자체도 결국에는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지요.나로 하여금 특별한 방식으로 가르치도록 시작하게 한 것은 정치적 의식화 과정 때문입니다. 나는 내 주변의 상황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학교는 광범위하게 실패하고 있었으며, 지식은 잠재적 교육과정을 통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여과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풍부한 문화와 소수자의 삶과 역사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식과 교수(teaching)에 대한 정치적 입장은 교실에서의 나 자신의 실천을 통해서 전환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실천을 하기 위하여 매일 46명의 학생들을 교실에서 마주치면서 교실에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결국 해야만 하는 선택과 정치적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패터슨에서의 인종운동과 계급운동에 실천적인 차원에서 깊숙히 참여하고 있으며 학교 안에서의 교육적 실천과 좀더 넓은 지역사회 안에서의 정치적 실천은 모두 오늘날의 저의 이론을 계속해서 형성해 왔습니다. 그곳(페터슨)에서 나는 교사운동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잠시동안 교원노조의 위원장직에 있었습니다. 교원노조의 활동 속에서는 당시의 교육 문제의 상황들과 정부정책 담당자들과의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 때문에 낙담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실천뿐만이 아니라 특히 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한 비판이라는 특별한 판단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패터슨은 빈곤퇴치 운동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약속한 자유주의적 성향의 캐네디와 존슨파 등의 민주당 지도부들에 의해서 정책이 시행되고 있었던 대표적 지역이었습니다. 교육과 정치적 실천의 장에 있었던 나와 다른 사람들은 교실이나 그 밖의 공간에서 분열을 만듦으로써 자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있고, 마약을 하고, 실업과 빈곤 상황에 있었던 많은 수의 학생들은 여전히 강하게 차별을 받았으며, 이런 체제는 이들을 과격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모로우: 당신은 정책 입안자들이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탁상공론식의 고민을 할 때 모순의 최전선에 있었습니까?



애플: 그렇습니다. 페터슨에서는 탁상공론식의 토론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볼 때 그 지점이 핵심 지점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나 자신의 분노와 정치적 근본 문제에 대한 탐구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나는 소위 미국에서 흔히 좌파성향을 가진 학부모를 일컬어 부르는 말인 “아기에게 붉으죽죽한 귀저기를 채우는(red or pink diaper baby)"이라고 불렸습니다. 이는 내가 처한 인종 운동의 활동가로서만이 아니라 보다 중요한 오래된 가족이라는 전통 안에 있는 나 자신의 상황에서 나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발견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생애사적 이야기들은 사회학적 이론보다도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사회학적 비판 이론은 종종 이론의 여성운동과 반인종주의 운동이 명확하게 보여준 것과 같이, 구체적인 삶의 과정에서의 억압에 대한 인식을 그 근원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후 저는 콜롬비아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대학가는 베트남 전쟁과 인종차별주의 등의 문제를 놓고 의견이 양극화되었으며, 정치 쟁점화되어 있었습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의 경험은 나의 교육적 정치적 생애사와 비판적 이론간의 모든 영역과의 연관을 만들어 주었으며, 나 자신의 이론적 기반을 쌓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모로우: 1968년도에는 당신은 어느 곳에 있었습니까?



애플: 예, 그 이후 저는 콜롬비아에서 위스콘신 대학으로 옮겼습니다. 저는 저의 연구에서 제한적인 관심만을 유지하지 않는 정치적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저는 다른 연구소의 연구 경향에 대해서는 반대하였습니다. 내가 1970년에 메디슨(위스콘신)에서 면접볼 기회가 있었을 때, 대학가에는 강력한 반전운동을 위하여 이론가들이 거리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의미에서 볼 때 가장 자유주의적인 집단들의 모임이었습니다. 내가 면접을 볼 당시(그 당시 건물에는 최루탄이 자욱하였습니다) 저는 바로 그곳이 제가 있어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는 저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적인 생애사인 것입니다. 결국, 그곳에는 제가 헌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정치적 의식화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모든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제가 이론적인 수준에서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집에서 학교로 등교하면서도 인종적 편견 때문에 분노하고, 상처받고, 두려워하는 학생들과 만나면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내가 매일매일 투쟁하면서 산다는 의식을 강화시켜주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형성된 민속지학적 이해는 어떤 부분들에서 매우 중요한 것들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모로우: 화제를 바꾸어 당신의 이론이 특정한 방향으로 형성된 데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당신의 회고적인 글들과 특정 글들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에서는 특히 대응이론으로부터 보다 확장된 개념의 ‘저항의 가능성’의 개념을 통하여 일상적 저항운동을 도출하고자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여 당신의 경험이 당신의 이론적 방향에 영향을 주었는지 짧게 설명해 줄수 있습니까?



애플: 이러한 변화는 기본적으로 이론적 전통의 변화에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보다 변증법적으로 사고해야 합니다. 물론 저는 다양한 비판적 전통 안에서 진행되었던 논쟁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는 철저히 유물론자이고자 하였습니다. 주위의 환경은 나 자신을 변화시켰으며, 나또한 나를 둘러싼 환경을 변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제가 원래 참여한 연구물의 상당부분은 정치적 현상학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사회적 현상학의 하버마스 이론, 비판 이론 등의 전통들의 일부를 통합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이에 더하여 제가 콜롬비아에서 함께 작업했던 한 동료(Dwayne Huebner)는 UTS(신학 연구 연합)에서 해방신학을 강의하였습니다. 나는 초기에는 비구조주의 맑스주의와 현상학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합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전통이 나의 관점에서 통합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통합이 얼마나 교육 현장의 정치학과 실제적 교육과정, 우리가 학생과 교육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우리자신의 구조화된 위치를 이해하게 도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작업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은 대응이라고 불리는 “자본주의 미국에서의 학교교육”에서의 보울스와 진티스와 같이 반자유주의적 입장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잠재적 교육과정을 이해한다면 학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잠재적 교육과정은 각 계급별 학생들의 궤적들을 실제로 비교 검토함으로써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내가 대응 이론에 대해서 비판하는 지점은 이 이론이 가지고 있는 교사에 대한 혹평, 문화와 인간 경험의 복잡성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 부족하다는 점이지만, 기본적으로 저는 이 이론이 전통적 인식에 대한 정치적 인식을 바로세웠으며,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의 전통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저는 자율성을 가진 문화라는 것을 핵심적으로 보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도의 결과로 “교육과 이데올로기”가 나왔으며, 이 책의 내용에서 저는 문화가 경제 구조에 영향을 받지만 단순한 반영물이 아닌 구체적 실재임을 주장하였습니다.


모로우: 당신의 구조주의는 정치의 실제적인 면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문화를 하나의 주제로서 구체화하게 되면서 시작된 것이군요.



애플: 맞습니다.



토레스: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전통을 보면, 여기에는 구조결정론과 스탈린식 독재주의를 극복해보려는 두 가지 지적 전통 즉, 알뛰세르와 그람시적 접근이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구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그들 자신이 알뛰세의 프랑스적 전통과 더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알뛰세는 그람시에 대한 특정한 해석중의 하나입니다. 이에 대한 동의 여부가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알뛰세는 넓은 의미에서 그람시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람시를 읽었을 당시에 어떻게 알뛰세가 이끌어낸 것과 같은 결론에서 탈피할 수 있었습니까?


애플: 내가 많은 장소에서 주장했듯이, 마르크스주의를 올바로 받아들이는 것은 진지하게 도전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뛰세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가 주장한 중층 결정에 대한 중층적 저항을 강조하는 면에 대해서 받아들였다는 측면에서일 것입니다. 사실 알뛰세적인 지적 전통에 대한 분석은 우리에게 구조와 문화적 특성, 정치적 특성에 대해서 사고할 수 있도록 합니다. 물론 이는 어떤 면에서는 구조주의적 분석이 빠질 수 있는 한계점도 있지만, 그러나 이는 우리에게 문화가 부분적으로 분화되는 방식과 문화가 상대적 자율성을 가지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게 해줍니다. 따라서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는 알뛰세적 입장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알뛰세적 입장은 정확히 말해서 결국 재생산을 아주 논리적인 수준에서 주장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활동, 투쟁, 저항을 위한 공간을 허락하지 못합니다. 저는 그 다음 책에서 이에 대한 주장을 첨가하였습니다. “교육과 권력”에서는 문화, 경제, 국가의 재생산적 관계의 의미에서만이 아닌 모순의 의미에 대해서 논의하였습니다. 저는 “교육과 권력”에서 이미 계급적 관계뿐만이 아닌 성과 인종의 문제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교육과 이데올로기”는 지배와 착취에 관한 큰 틀에서의 분석이었습니다. “교육과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부분에 인간의 활동에 대한 희망을 이후의 주제로 할 것이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이는 아직도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한 정도입니다. “교육과 이데올로기”, “교육과 권력”을 쓴 후 나는 교사의 탈숙련화와 계급적 위치의 변화가 구체화되는 증거에 대해서 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가 교원 노조의 위원장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교사, 학생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는 학교에서의 개인적 정치적인 의미를 만들어 내는 여러 활동 방식이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 이는 제가 교사들과 깊은 신뢰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미국의 보스턴 여교사 단체와, 메디슨에 있는 페미니스트 교사 연맹의 일부와 매우 친숙하게 논의하고, 또한 교사 노동에 대한 분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분석에서 저는 교사의 탈숙련화와 교육과정에 대한 권한의 해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합니다.” 한참 동안이나 저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던 한 교사가 “애플씨! 당신은 특정한 방식으로 성차별을 당하고 있는 삼십 명의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적은 없습니까?”라고 말하더군요. 그 말은 내겐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내가 종합하고자 했던 저항과 투쟁에 대한 강조만 있었을 뿐, <사회의 성차별 문제에 대한 논의가 없었다는 사실>조차도 내 연구물에서 다루지 못했다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여교사의 노동이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가사노동의 확장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의 문제에 대한 인식 없이는 교육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나의 아내 Rima는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지식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기 위한 투쟁을 강조한 처방의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나는 교육 공간에서의 복잡성과, 교육에서의 매우 모순적인 형식을 위한 비재생산적 형식,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에서의 계급, 인종, 성적 관계들까지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영역으로 저의 주안점을 옮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알뛰세의 이론에 대한 급진적 재구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뛰세의 이론은 인간의 활동에 대한 이론을 포함하지만 또한 중요하게 중층결정론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층결정론에서는 성이 계급을 생산하기도 하지만 모순되기도 하며, 성과 계급은 인종 문제에 의해서 생산되기도 하지만 모순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회가 형성되는 메커니즘입니다. 각각의 요소들은 문화, 경제, 정치의 영역에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가지고 작동합니다. 알뛰세의 이론은 일반적으로 복잡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나는 카메론 맥카시(Cameron McCarthy)와의 공동 연구물인 “학교에서의 이데올로기와 실천”이라는 글의 도입 부분에서 이러한 이론을 명확히 해보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고백하건대, 사실 그 연구물의 내용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의 역학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복잡합니다. 하지만 나는 맹목적인 교인은 아니기 때문에 이전의 내용에 대해서 비판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모로우: 당신의 주장은 알뛰세적 주장을 제외한다면 그람시적 내용에 가깝습니다. 여러 차원에서 당신의 연구물은 당신의 이론적 내용의 변화나 급진적 교육관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당신의 생애사와 연구물들을 보다 통합적인 방식으로 재연결시킨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토레스: 맞습니다. 이론은 실천을 반영하는 것이 문화에 있어서의 유물론자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연구물이 포함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상호작용과 비판적 토론의 가능성을 부정한 채로 이론적인 수준에서만 비판하는 것은 교묘한 음모에 가깝습니다.



모로우: 그런데 이전에는 실천이 당신의 이론에 선행하였던 것에 비하여, 당시에는 이론이 실천 앞에 있었습니까?


애플: 부분적으로는요. 그러나 실제적으로 구조주의적인 재생산의 관점에서 쓰여졌던 “교육과 이데올로기”보다 “교육과 권력”의 경우에는 더 유동적이었습니다. “교육과 권력”을 쓸 당시에는 학문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이유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습니다. 내가 언급하였듯이, 나는 반체제적인 여성그룹과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또한 위스콘신에서의 자동차 공장의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하는 노동조합과 함께 하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나의 제자 중에는 베트남 숙련 기술자이면서 정치적 활동가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결집했고 우리는 함께 어떤 정치적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교직을 얻을 수 없었으며, 공장에서 조립라인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반체제적인 노동조합 조직을 결성하여 노동조합 이데올로기와 구조, 그리고 그 공장의 매우 보수적인 경영전략, 양자에 대해서 비판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들은 내게 정치 교육의 조건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이는 나 자신을 단련시키는 과정 중 일부였습니다. 나는 콜롬비아의 교육현장에서 단련되었습니다. 나의 교육 노동자로서의 단련은 그들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면서, 나 자신도 바랬던 강력한 물적 조건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나는 “교육과 이데올로기”의 내용이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일상적인 삶의 내용을 설명하는데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헤게모니의 형성 과정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지만 이는 매우 모순적 과정이었으며, 그들은 이에 대해서 매일 저항하고 있었습니다.노동자 중 일부는 종종 성차별적이며, 인종차별적입니다. 이는 그들이 매우 모순적인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상태는 폴 윌리스의 이론에 들어맞습니다. 폴 윌리스는 내가 교육과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접근하고자 했던, 직접적인 재생산이 아닌 계급 편입과정에 대한 문화적 재생산과정을 강조하였습니다. 결국, 윌리스의 이론은 실천적 행위에 선행하는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천은 곧 이론을 따라잡고, 이론을 추진하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로우: 이제 현재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예를 들면 우리들이 캐나다에서 이론적 연구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미국에서의 비판적 입장의 학문이 과거 10년에서 15년 사이에 믿을 수 없는 수준으로 눈부시게 발전하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물론 그만큼 미국의 정치상황이 어둡다는 것을 반증하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시 행정부는 공화당 주도권을 오랫동안 행사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당신은 대중 매체와 정치적으로 명백한 문제 안에 존재하는 공공연한 잠재적 우려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애플: 그 문제는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경우에 있어서 미국 내에서의 좌파진영은 주변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미국은 대중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나라이고, 대중주의는 우파와 좌파 양쪽으로 경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비하여 요즈음 저의 최근 연구물인 “사회 민주적 합의”에서 저는 그동안 분열되어 왔던 중간 계급들이 효과성, 책무성, 경영기술, 신보수주의적 학파, 경제적 현대화의 이슈를 가지고 신우파 연합을 결성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엽합은 중요한 측면에서 승리하고 있습니다. 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한 당신의 분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이나 노동조합 등등에 있는 사람들의 비극은 그들이 그러한 우파 연합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로우: 자유주의에 대한 공격에 의해서요?


애플: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현재의 급격한 상황에 대해서 말해보죠. 나는 많은 좌파들이 소위 말하는 자유주의적인 “개인적 권리”를 점점 인정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우리는 자유주의를 지배계급이 무엇인가를 은폐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단순하게 이해하려는 경향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현재의 부르주아적 권리라고 불려지는 것들이 투쟁의 결과였다는 것이 더욱더 명백해졌습니다. 초기의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은 단순히 서로 대립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서로 타협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지역사회의 사람들의 실제적인 문제에 착목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올바르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은 기나긴 투쟁사의 현시점에서 자유주의적 성과들이 얼마나 미비하고 앞으로의 과제가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또한 이러한 자유주의적 성과에 대한 비관적 비판 이론 또한 여러 어려운 문제들을 양산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전의 비관적 비판이론이 억압을 증명하고 파헤치는 데에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이론은 우리들에게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비관적 비판이론 수준의 논의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지도 못하면서 비극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이론은 부분적으로는 분노에 대한 어쩔 수 없는 비관적 관념을 가람들이 가지도록 함으로써 우파의 새로운 헤게모니의 재구축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의 경우에는 대기업에 대하여 반대하는 인민주의자들의 정서가 있지만 우파는 이를 어쩔 수 없는 비관적인 관념을 통해서 비껴나가고 있습니다. 좌파와 인민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개입할 수 있어야 하지만, 화려하지만 추상적인 관념의 과잉이라는 문제와 실제적 삶과의 연관을 확보하지 못하는 문제 때문에 개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이론가들의 연구내용을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서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연구는 물론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과정에 있어서 우리들은 정치와 교육의 공간을 우파에게 점령당하고 있으며, 공적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도 그들에게 점령당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토레스: 이러한 상황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매우 짧은 기간이었지만 내가 스탠포드 대학에 있었을 때의 미국사회에 대한 경험에서 저는 사회주의의 전통을 구성하는 구좌파와 신좌파 진영의 균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균열이 학교 비판론의 새로운 조류의 이론가들이 공격 지점을 잘못 택한 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까?


애플: 나는 비판이론의 공격지점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은 억압적 조건의 근원적 문제를 이탈해 있는 자유주의적 전통에 대해서 광범위하게 반대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전통 속에도 주요한 성과도 있습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서 그들이 다시 정치적 의식화의 길로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의 모든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성과들을 공적, 사적 영역 모두에서 방어하면서 민주적 방향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근본적인 민주주의를 향한 계획이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이론적 흐름의 진영들을 근본적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재정립한다면 이러한 계획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교육의 공간에서 인종차별주의 반대 운동과 민주적 사회주의의 운동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새로운 운동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흐름을 재정립하고자 합니다. 나는 아직까지 아무것도 재정립하지는 못하였지만 미국에서의 문화정치운동과 민주적 사회주의 운동의 관계에 대한 전체 역사를 재정립하고자 합니다. 역사적으로 언제나 제가 지금 하고자 하는 작업을 요구하는 운동의 흐름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특히 1910년에서 1920년까지의 기간에 이러한 흐름이 진행되었었기도 합니다. 이러한 흐름이 실패한 데에는 미국에서의 민주적 사회주의 운동진영과 인민주의 운동진영이 의식적으로 극좌로 치달으며, 수십년 동안 지배집단의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메카시적 탄압에 여전히 놓여 있는 나라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나라는 라틴계 미국인, 아시아계 미국인, 인디언, 아프리카계 미국인, 그리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폭력적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구좌파의 접근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이는 그 자신들을 극좌적 경향으로 만들어간 여러 저항집단과의 연대의 부재의 문제와 부분적으로는 경직된 결정론적 비판이론의 문제일 것입니다.

모로우 : 1차 세계대전이 종반으로 치달을 무렵이었지요. 이 시기 사회주의당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가져다 준 공포에 대한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직업경찰들을 동원하여 사회주의 당조직을 붕괴시켰습니다.



애플 : 그렇습니다. 미국의 노조 운동에서도 당시의 여파가 부분적으로 나타나는데, 선진 서구 산업 국가들의 인구규모를 놓고 볼 때 미국 노조운동은 여전히 가장 규모가 작은 국가에 속합니다. 노동조합들은 주요한 승리들을 거두어왔고 사민주의적 화합을 창조하는데 한몫 해왔지만, 국가는 억압과 주변화를 통해 이를 약화시키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이런 점에서, 좌파 내부의 분열을 비난하더라도 아주 신중을 기했으면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롱 섞인 농담까지 있을 정도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농담 역시 훨씬 긴 이야기의 한 토막이죠. 미국이란 나라는 역사 이래로 늘 민주적 사회주의 전통이 형성되기 어려운 조건이었습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미국은 인구 유동성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민자를 싣고 들어오는 배는 그만큼의 사람들을 다시 고국으로 실어 가곤 했었지요. 그리고 가장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사람들 다수는 (미국 내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회주의적 전통을 만들지 않았거나 혹은 급박한 과제를 다루기 위해 반복해서 돌아가곤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지닌 굉장한 개방성과 건국 당시부터 애초에 백인 남자들이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를테면, 계급 정치와 정치 투쟁이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영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계급을 근거로 하는 정치 영역을 확보하는 투쟁에 나설 주체가 애초부터 모호했다는 의미로 연결됩니다. 미국에서는 그러한 투쟁이 매우 다른 모습으로 분화되어 나타났는데, 이는 미국에서 사회주의적 프로그램을 명료하게 구성하기란 매우 어려웠음을 의미합니다.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 그것(사회주의 프로그램)은 대중(추수)주의적(populist)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계급 관계 역사가 길다고는 해도, 그 관계는 지역 특유의 정치/문화/인종/종교적 역사에서 비롯된 고유의 특성을 가집니다.



모로우 : 그것과 관련하여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캐나다와 유럽의 관찰자 입장에서는, 미국 정치 문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의 하나는 단일-쟁점(single-issue) 정치학이 지배적이라는 점인데, 지난 시대에 이는 사회주의 운동이 제시하려 했었고, 자유주의적 (사회개혁)프로그램이 제공했던 통합적 얼개의 부재를 반영합니다. 아직도 이렇다고 보는가요?

애플 : 그렇습니다. 우파가 두드러진 성공을 거둔 것 가운데 하나는 특수 의제 주변에 있는 단일-이슈 집단들과 제휴를 맺어왔다는 점입니다. 표준화 / 그릇된 “공통문화” / “선택” / 낭만화된 과거 / 학교와 임노동 간의 연결 보장 등이 교육 내 이슈입니다. ; 이것이 맺어져 제휴가 형성되었지요. 우파는 이것을 해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헤게모니 우산을 제공하기 위하여) 핵심적으로, 그것(우파)은 말하기를, “우리(우파)는 양보할 것이다. 당신은 뭔가를 원한다.(예컨대, 대중주의자와 중간 계급은 사회이동과 기회에 필요한 힘을 원한다) 우리는 당신에게 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 경제적 현대화 우산 밑으로 들어와 제휴를 맺는다면.” 우파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테마(일본과 경쟁하기 위해서 등등)를 함께 섞어왔습니다. 즉, “가족 우선” 문제, 표준, 성(sexuality), 약물 등등을 자신들(우파)의 총지휘 아래로 조직해왔고, 우파는 “자유기업”의 경제이데올로기를 전사회로 파급시키는 목적에 그런 문제들을 이용해 왔습니다. 단일 쟁점들은 사실상 미국내 우파에 의해서 명민하게 함께 접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제휴의 전망은 실제로는 불투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제적 현대화가 이런 방식으로 일어나려면, “자본”은 느슨하게 조직되어야만 합니다. 현 시기, 자본의 이데올로기적 제형태 그리고 자본주의가 <상품화를 의미하는 경제 양식>에 의해 스스로 작동하는 방식은 신성한 전통과 신성한 앎의 비젼을 전복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고로, 임노동자로서 ‘나’는 내 직업에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만일 직업을 가질 정도로 운이 좋기만 하다면) 휴가를 가거나 TV나 VCR을 구입하러 가거나, 캠핑이라도 갈라치면 나는 작업장 밖으로 걸어나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물론, 그 과정(경제적 현대화)에서 직업 규율은 전복됩니다. 동시에, 정당성을 유지하면서 이윤도 창출하기 위해, 우리 경제는 여성의 위치-가정에 의해서만 정의되는-에 대한 낭만화된 비젼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우파가 내세우는 인민주의(대중주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것을 내다 팔기 위한 상품으로 만드는 걸 강조하는 “자유-시장”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모로우 : 디즈니(Disney)식 세계관인가?
플 : 부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것(그런 세계관)은 협박당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공장주가 될 수 없고, 시장의 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가족 내의 전통적 위치와 과거의 신성한 앎을 지켜낼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상호 배타적입니다. 그래서 이 제휴는 결국 깨어져 버리게 된다는 게 내 느낌입니다. 이 모든 의미들은 학교, 모든 작업장의 민주화를 소중히 여기는 우리 모두, 그리고 다른 불만을 품은 다른 집단들이 연대할 수 있다는 객관적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현재 우파에 의해 조직되고 있는 사람 가운데 보다 민주적 입장을 지닌 이들과 연결하여 연합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토레스 : (실례를 무릅쓰고) 당신은 형식 교육의 역할을 우선적으로 논의하는 것으로 들리는데, 당신은 비형식 교육이 아니라, 학교를 근간으로 연구하는 연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신이 우익 연합이 무한정 유지될 수 없다는 가정을 옳다고 보고 있다면, 보다 “공세적”인 전략의 궁극적 기초로서 교육 내에 새로운 저항의 형태들을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는 것인가요? 내가 당신의 언급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습니까?

애플 : 물론입니다. 어려운 부분은 이겁니다. 적절한 그룹이 어디 있느냐를 찾는 시도, 그리고 그것을 하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런 과제설정은 그것(새로운 연합 창출)을 너무 전략적으로만 들리게 합니다. 그리고 이는 내가 의미한 것 보다 덜 유기적입니다. 나는 “탈중심화된 화합”이라고 부를 만한 상태를 지향하며 활동해왔습니다. 나는 계급 만이 사회 변화의 조직적 역량을 제공하는 기초 엔진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내가 “교사와 교과서”에서 다양한 동인들과 다양한 투쟁들이 있는 장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모로우 : 그러면 당신은 Philip Wexler 같은 사람이 비난할 수도 있는 그런 방식으로 완전히 베낀 건 아니겠지만, 후기구조주의 논쟁의 영향을 받아왔습니까?

애플 : 확실히 그렇습니다. Philip은 내가 존경해마지 않는 벗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그와 나는 함께 저술작업을 해왔습니다. 이 문제(후기구조주의의 무조건적 수용)를 다룬 저서는 내가 편집에 참여한 “Critical Social Thought"(비판적 사회사상)이라는 단행본 시리즈로 나왔습니다. 나는 그의 직관이 정확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계급이 인간행위자가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관념이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 위치에서 이탈시켜야 합니다. (계급관계의 힘이 가진 진가를 여전히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중심이동은 우리가 인종구성의 쟁점과 성gender 정치학의 쟁점을 여성은 물론 남성까지 함께 포함해서 고찰한다면 가시화됩니다.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이, 이것은 나의 이전 정치학으로 사실상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가족의 정치적 배경(가족의 노조 전통, 인쇄공이었던 나 자신 등등) 탓에 나를 형성해온 것은 노동계급 정치학만은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전에 언급했던 대로, 나는 인종 정치학 내에서 인성이 형성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내 생애사 일부로의 회귀입니다. 하지만 일부 후기구조주의적 견해에 대해서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나는 이에 대해 솔직해지고 싶습니다. 나는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을 위임받은 의미 있는 조직이 전혀 없는 한, 지배의 형태는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견해가 포스트모던적 조건 그 자체를 현실화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즉, 그것은 어떤 구조가 존재하고, 그 구조들이 대규모의 지배와 착취형태에 대한 관계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고 인식하는데 있어서의 우리의 무력함을 거울처럼 비춥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다음의 사실을 시인합니다. 내가 브라질, 태국,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 교육적, 정치적 작업 및 아기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 생계유지에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얻어내기 위해 / 심지어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학교교육을 보장받기 위해 벌이는 민중진영의 투쟁에 참여하고 있을 때, 그리고 내가 그러한 민중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 운동단체 건설작업에 참여할 때,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내가여러 상황 내의 다른 관계들보다 나는 ‘자본주의’라고 객관적으로 불리는 것이 훨씬 더 억압적인 관계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함을 시인합니다. 계급환원주의를 넘어서려는 우리의(폭넓게 공적을 인정받을 만한 페미니즘 이론들이 명민하게 보여준 대로) 시도, 그리고 인종, 계급, 성gender, 성문제sexuality, 다른 관계에서의 지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인식하려는 우리의 시도에서, 우리는 엄연히 존재하는 <육중한 구조화의 무게>를 때로는 잊곤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 경험 때문에, 그리고 내가 가난하게 성장했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우리가 사실상 한도 끝도 없이 각양각색인 권력 담론이 있다는 관념에만 지나치게 안주할 때 그 견해가 안게되는 위험성이 무엇인가를 통해 사고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똑같은 억압의 형태라는 관념을 너무 쉽사리 지지할 가능성이 엿보입니다. 안 그런가요? 정치적 이유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억압을 느끼는 사람들은 함께 조직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는 억압이 모두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본주의적 경제, 문화, 정치의 “이익”을 우리 모두에게 가져올 수 있게 하려는 국가적, 국제적 운동(옮긴이 주: 소비의 정치학)이 파생시키는 사악한 결과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상상은 아닙니다. ; 이것들은 실재하는 객관적 조건들입니다. ‘생산의 정치’는 ‘소비의 정치’로 완전히 대치되지 않았습니다. 담론을 논하는 것은 사실상 강력하고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의 한계와 그것의 과도한 이론구성(지나친 추상성) 경향을 인식하지 않는 한, 우리는 세계가 우리 주변에서 무너지고, 민중들의 삶과 희망이 파괴되는 동안에도 미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여기에서 나를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들 내의 긴장이 갖는 막강한 힘을 어물쩡 넘겨버리려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가정”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여성이 당하는 무자비한 억압은 정확히 잔인함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내 견해는 우리들이 물적 조건들, 그리고 <“난해한” 용어들 내의 모든 것을 보기 위하여 분주히 돌진하는 중에 잊혀져버리고 있는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담론이 나름대로의 중요성과 장점이 있을지라도, 나는 세계를 단지 일종의 “text"로 바라보는 것에는 현실적인 위험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계급 본질주의자 혹은 경제 환원주의자는 아니지만, 자본주의 하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 의미하는 바가 있으며, 나는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는 믿음을 품고 있습니다.

모로우 : 이제 화제를 ‘세계체제’로 옮기도록 합시다. 특히 중심부 국가과 주변부(종속) 국가의 관계를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토레스 : 이 대화로부터 우리 셋이 미국사회의 주류(전통)에서 벗어나 있음이 명료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나는 제3세계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중의 “아웃사이더”입니다. 내 질문은, “어떻게 우리는 변화시킬 힘이 있는 교사-물론 이들은 세계체제 맥락에서 보았을 때 중심국가(사회)에서의 지배/통제 시스템의 일부분이죠-를 만들 수 있을까?”입니다.


애플 : 나는 인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투쟁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연관을 맺고 있는 국제적 맥락을 이해하는 문제를 허술하게 다루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관계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인터뷰를 하기 위해 이 방에 걸어 들어와서 전등을 켰다.” 이 사실을 가지고 한 번 이야기를 해봅시다. 우리는 “마이클 애플이 이 방 안에 걸어들어 왔고 녹화용 비디오 테이프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불을 켰다.”라고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단순한 묘사는 내가 불을 켰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사회적 관계를 맺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불을 켜는 과정에서 석탄을 채굴하는 광부들-전등을 계속 밝힐 수 있도록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받거나, 심하게 다치거나, 심지어 죽어갔을 많은 이들-과 사회적 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 실재하는 관계 속에 있다는 관점에서 이 문제들을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다른 이들과 실재하는 관계 속에 있다)은 우리가 세계(국제)적 관점에서 사고할 것을 분명하게 요구합니다. ;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중심부 국가 내의 사람들-자신들이 누리는 안락이 더 가난한 국가의 민중들의 노동에 얼마나 맣이 의지하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의 마음(마인드)을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적, 정치적 쟁점이 있습니다. 제국주의 중심부의 안쪽에서 일어나는 교체들이 중심부의 외곽에 있는 민중의 생활에까지 충격을 미친다는 점에서, 나는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지배체제에 얼마나 단단하게 속박되어 있는지를 명료하게 밝히기 위해서 교사들, 아이들, 성인들 등의 사람들과 함께 정치 교육에 관여하는 것 외에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3세계 피압박 민중들의 삶(문화, 정치, 경제)의 조건을 개선하기(억압을 덜기) 위해서는 단순히 타이티, 세네갈, 멕시코, 니카라과, 기타 등등... 의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야수의 복부에 해당하는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의 핵심부에서 변화가 일어나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요.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는 폭압 정권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온 유학생들도 있고 혹은 이제 막 민주화가 시작된 국가에서 온 학생들도 있는데 이들이 나에게 주는 자극 덕분에, 현재도 나는 이것을 끊임없이 깨닫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국가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왔는데, 실제로 아시아의 어떤 나라에서는 체포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그때 내가 체포당한 이유는, 내가 정부의 반민주적 정치/교육정책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교육학자로서 반민주적 관계들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해야만 함을 의미합니다. 반민주적 관계가 발견되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교육이 가진 힘이 무엇이든지 간에, 교육은 교사들로 하여금 이 관계들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으로 세계를 누르고 있는 다양한 억압을 망라하여 일시에 바꿀 수 있으리라고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나는 내 스스로를 교육학자라고, 교육가라고 부르는 한, 나에게는 실천 외의 어떠한 선택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중심/주변” 관계로 이 쟁점들을 속속들이 다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중심국가 내에도 제3세계는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단순히 아르헨티나라든지 칠레 얘기를 계속 하려는 게 아닙니다. 미국 내의 제3세계 민중들에 대해 꼭 얘기하고 싶습니다. 게다가 이 부분은 많은 이들이 이해해야만 하는 투쟁의 지대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미국/캐나다의 노동계급을 멕시코/말레이시아 등등의 지역으로 수출만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 내에서 제3세계 인민들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파괴하고 있는 동시에, 경제/교육 정책과 그것의 실행으로 그들을 무능력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 국가 안쪽에는 여러 국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쟁점을 둘러싸고 진행되고 있는 교육적 실천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것이 나의 그람시적 부분입니다. 당신은 제국주의 본부 주변에 있습니다. (게다가 엇갈리는 문화/정치적 형식들을 가지고서) 그 국가의 바깥쪽에만 위치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그 안쪽에도 속해 있습니다. 고로, 자국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경제적 지배나 착취의 관계들을 포위해 들어가는 것 역시 우리의 임무입니다. 더불어, 바로 이 곳에서 가능성들을 하나하나 쌓아올려야 합니다. 물론, 성공적 투쟁이 남긴 잃어버린 우리의 공통유산을 되찾기 위해, 그리고 “장구한 혁명the long revolution”의 발걸음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교육학 수준에서 담당해야하는 구체적인 작업도 가능성을 쌓아가는 일에 포함됩니다.


모로우 :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을 하고 싶네요. 다만, 이 질문은 급진적, 비판적 교육학 전통 내부에 분열을 조장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헨리 지루가 주장한 종류의 전략(특히, "가능성의 언어"를 그가 강조한 것 등.)에 대해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하고 싶은가?” 그리고 “지루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지적 전통인 비판이론을 끌어오는 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프레이리와 지루의 시도와의 관계는?” 당신이 주장한 전략과의 관계 속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다.



애플 : 헨리와 나는 수년 간 친구로 지내왔습니다. 나는 70년대 초반에 미국 내에서 네오 맑시스트적 문화 전통을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처음으로 했었습니다. 헨리와 다른 이들이 함께 하게 된 건 그 다음의 일이다. 1970년에는 매우 외롭게 이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70년대 중반쯤 그의 합류를 나는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헨리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모든 원고를 나에게 보내곤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서 많은 걸 배우게 되었지요. 그는 매우 지적으로 명민하고, 여러 연구를 통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어깨를 딛고 올라섰습니다. 여러해 동안, 헨리는 내 어깨 위에 서 있었고, 내가 그의 어깨 위에 서 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글 안에서 혹은 기타 등등의 경로를 통해, 서로 비판한 적도 있었고 앞으로로 그럴 것 같습니다. 다만 나는 이것(상호 비판)이 아주 협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서로 동의하지 않을 때도 꽤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저작은 추상성이 지나친 경우가 있는데, 이는 위험스럽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삶을 명료하게 연결시켜 보여주어야 하는 때가 있으며, 때로는 상세히 다룰 것이 요구되기도 하는데, 헨리는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짐작컨대, 나는 헨리보다는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던 전통에 대해 낙관을 하지 않는 편이고, 비판이론에 대한 저의 태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만큼 비판이론에 심취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아마도 부분적으로 내가 초기에 하버마시안에게 학문적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특별한 개념적, 정치적 이유를 위해서 부분적으로 네오 그람시적 부분과 급진적 민주주의만 (내 이론적 논의 내에) 남겨두었습니다. 그 전통들은 보다 민주적인 정치학을 제공할 뿐 아니라, 비판이론을 한결 발전시켜서 보다 명료화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편으로는, 나는 그가 Aronowitz와 함께 하고 있는 작업이 문화정치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있었던 Bloom-Hirsch논쟁, 반-인종주의, 탈식민이론의 기반 위에, 예컨대, “가능성의 언어”를 세우려는 등이 그들의 작업입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 대부분이 그러듯이, 그는 우리의 작업에 대한 비판을 보다 많이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는 종종 그의 주장에 일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는 자칭 진보적 사람들에게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우고, 또 가르쳐야 합니다. 나는 -그를 야만스럽고 비도덕적으로 다루었던 - 보스턴 대학에서 그의 종신재직권 평가를 위한 외부 평가자로 지명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최선을 다해서 그를 지지했었습니다. 나는 서로에게서 최대한 배운다는 생각을 가지고 서로를 비판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전통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며 전통의 오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민주적 좌파의 전통 위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논의 내에서 개방성(열림)과 민주적 행위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대립하여 싸워야 하는 관계임을 계속 되풀이하여 기억시켜야 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비판을 환영합니다. 단, 그것이 열린, 그리고 진솔한 풍토 속에서 주어질 때.



토레스 : 당신은 프레이리에게서 상당히 많은 요소들을 끌어왔습니다. 프레이리식 접근에 대한 당신의 주된 비판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프레이리의 사상 가운데 가장 감명 받은 부분은요?



애플 : 내가 칭송해마지 않는 사람이 몇 있는데, 프레이리는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와 아는 사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경험과 사건을 함께 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비판해야만 합니다. 우리(사람들)에게는 신을 창조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내가 알기로 이것은 프레이리 자신에게도 불편한 일입니다. 내가 브라질에 머물고 있었을 때, 프레이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진보적 인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내 생각에, 신(프레이리)을 창조하면서 저질러지는 해악의 하나는 그들 국가에서도 그들 작업에 대한 논쟁이 있다는 걸 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은 프레이리의 교육이론에 대해서 그 이론의 뿌리가 있는 본토에서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는 지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다양하고 때로는 갈등하는 전통들의 본래 모습들과 연결시킴으로써 수입된 이론을 더욱 강력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재구성도 없이 혹은 그것 내의 모순을 생각지도 않고 외국이론들을 단순하게 어디서든 적용가능한 정치적/교육적 자원으로만 보는 것에 대립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론들의 강점과 약점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행위자의 살아있는 경험들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교육적 깨달음을 얻기 시작한다는 의견에 나는 상당히 공감하며, 그것을 자극하는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의견에도 동의합니다. 이 지점에서 프레이리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겼다고 봅니다. 이렇게 그의 이론에 동의하면서도, 우리가 내용의 문제를 너무 많이 포기해왔다는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나는 보다 그람시적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가진 고정관념은 나를 비통하게 만듭니다. 정치적 교양-아주 서서히 창조된-을 갖춘 사람을 논할 때, 흔히 “부르조아적”이라고 부르는 지식은 그러한 교양의 핵심에 들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필요한 자원이 언제나 다소간은 이미 공동체 내부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그들에게서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 가정합니다. 나는 지식 모두가, 심지어 전통적 훈육조차도, 사람들의 노동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지식)은 그들(노동하는 사람들)의 것이며, 그들(노동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들의 것(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내가 비록 교육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그리고 내용의 문제를 보다 진지하게 다룰 것입니다. 또한 나는 우리가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면서 제3세계 안에서 그리고 투쟁의 실천 속에서 발전되어온 빛나는 소산들을 고스란히 있는 그대로 가져다 쓰는 위험에 빠져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해방에 대한 비판적 참여를 갉아먹는데 기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말했었듯이, 그것을 우리 교실 안으로 옮겨오기가 쉽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조건이 일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다시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것을 산업화된 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다룬 이론과 그네들의 삶의 구조 주변에서 그것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사리 또다른 유행을 창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상, 우리는 너무 자주, 프레이리(의 이론)를 쉬운 모델로,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갖다 쓸 수 있는 기술 정도로 채용한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투쟁 속에서 세워진 (이론)이며, 그것을 민중과 ‘다시’ 연결하고 다시 세워야한다는 점을 망각하고서 말입니다. 그래서, 내게는 아주 다양한 위험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프레이리의 접근은 다음의 몇 가지 측면에 대해서는 진전을 이루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즉, 비형식 교육에 대한 규범적 사고 방식에 있어서의 진전, 누구의 지식이 인정받는지에 있어서의 진전,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런 지식을 비판적으로 명료화할 지에 있어서의 진전.

우리의 작업 형태는 문화정치학입니다. 문화정치학에는 우리 모두가 “희망의 여정”, “장구한 혁명”-레이몬드 윌리엄스의 표현-을 위한 작업도 포함됩니다. 이런 작업을 소홀히 하거나 이런 작업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수백만의 학생들과 교사들의 삶을 모르는 체 하는 짓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것은 기존권력의 승리를 수수방관하는 짓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