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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개혁의 허구 : 시장과 표준과 불평등


**이 글은 2001년 마이클 애플 초청 강연회 자료집에 수록된 글입니다. 


마이클 애플, 강신현 역


유명한 교육과정 논쟁사에서 허버트 클리바드(Herbert Kliebard)는 교육적인 논쟁거리는 집단들간에 무엇을 "훌륭한" 가르침과 배움으로 볼 것인가, 어떤 것을 "정의로운"사회로 볼 것인가, 무엇을 "합법적 지식(legitimate)"으로 볼 것인가에 이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항상 수많은 갈등과 타협이 있었다고 했다. 교육에서 인종과 계급 그리고 성적 정의(justice)에 대한 견해가 상이하기 때문에 그러한 갈등이 생기게 되며, 선진사회는 현재 이를 매우 중대한 작업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한 상이한 전망을 가지고 있는 집단들은 교육자나 일반 시민의 상상력(imagination)을 같은 수준에서 다루지 않을 뿐더러 전망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의 크기도 차이가 있다. 하지만 현재의 이러한 투쟁을 통해 변화되고 있는 교육의 장을 핵심에 위치시켜 세밀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진지한 교육적 분석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분명하다. 

오늘날도 과거와 다르지 않다. 일련의 "새로운" 타협과 새로운 제휴를 통해서 새로운 권력집단은 교육 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이런 권력집단은 전반적인 교육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시장화 해법으로 푸는 것에 동의한 다수의 자본분파, 성취도와 지식에 대한 국가의 표준을 더 높여야 하며 과거의 "일반 문화(common culture)"로 "돌아가야(return)" 한다는 신보수주의 지식인, 세속주의를 혐오하고 그들의 전통보존에 집착하는 인민주의 종교근본주의자(populist religious fundamentalist), 책무성/평가/"경영"의 이데올로기 및 이러한 기술을 수용한 상당수의 전문화된 신 중간계급들이다. 이들 동맹에는 상당한 긴장과 갈등이 있지만, 대개 전반적인 목적은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키고, 이익을 증대시키고 국제적 관행을 강화시키며 낭만적인 과거의 "이상적인"가정, 가족, 학교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교육적인 조건을 공급하는데 있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제휴는 교육을 더 폭넓은 일련의 이데올로기적인 논쟁영역으로 통합했다. 교육의 목적은 경제사회적 복지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들은 최근 확산되고 있는 벨 곡선(The Bell Curve)이 비참하게 보여주듯이 국가의 사회적 책임의 극적인 방기, 학교 안팎에서 광범위한 경쟁적 이동구조의 강요, 경제적 안정에 대한 대중의 기대 하락, 문화와 육체의 "통제강화"(disciplining), 다윈주의적 사고방식의 대중화로 요약되는 자유시장이란 극적인 허구를 한껏 퍼뜨려 놓았다. 

경쟁, 시장, 선택과 한편으로 책임, 실행, 목적, 기준, 국가시험, 국가교육과정이란 외견상 모순되는 용어는 너무 시끄럽게 울려퍼져서 어느 것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이다. 내가 󰡔교육과 문화정치󰡕에서 밝혔듯이, 이런 경향은 실제 묘하게 상호작용하여 많은 나라에서 보수적 교육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새로운 시장과 과거의 전통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신우파 급격한 등장은 "(절멸할 지도 모를) 백인(기독교)전통과 가치의 안식처로서 문화주의적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입장을 배경으로 등장하였다. 이런 입장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신화화되어 현재를 혹평함으로서 과거의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개리 맥클로치(Gary McClloch)는 학교의 본질적 이상은 역사적 변화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안전하고, 교화되고, 진보적인"(말하자면 사회와 개인의 발전과 진보를 이끄는) 교육의 지배적인 이상은 "위협적이고, 탈선에 노출되어 있고, 퇴보적인"것이 되어버렸다. 오래된 과거는 더이상 안정의 근원이 아니라 실패와 실망, 손실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진보주의가(progressivism) 교육정책과 교육방식을 지배하고 있으며, 이전 유물을 파괴했다는 인식이 윌리암 베넷(William Bennett), 이.디 히쉬 주니어(E.D. Hirsch, Jr)와 같은 인물의 대중발언을 통해 울려퍼지고 있다. 그들은 교육과정과 학습(학생은 물론이고)을 강력히 통제하고, "국가의" 잃어버린 전통을 회복하며, 과거에 교육이 그러했듯이 더욱 훈육적이고 경쟁적으로 교육을 재편해야만 비로소 효율적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런 인물들은 비판은 유사하게 하지만 ‘다른’ 미래를 위해 ‘다른’ 과거를 지향하고 있는 사람들과 결합되어 있다. 그들이 지향하는 과거는 외경과 권위로서 과거가 아니라 시장의 "자유"로서 과거인 것이다. 그들은 학교를 시장의 방임으로 재편하지 않고서는 우수한 인간이 생존할 수 없으며, 외경과 권위는 물론이고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우리는 이런 정책이 근본적인 전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것이 정치적 스펙트럼이 다른 곳에서 생겨났더라면 우리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흐름을 제공하는 여러 차원에서 상당한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정책은 낭만화된 소박한 과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개혁은 연구결과가 토대하고 있는 근거를 그다지 비중있게 다루지도 않았다. 연구가 진행되었다 해도 대개 강력한 책임을 지는 관리체제나 시장이 전제하고 있는 효율성에 관한 기존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로서 사용되었거나 혹은 상당히 결함이 많은 다른 연구에 - 시장화에 관한 글을 상당히 출판한 쳡(Chubb)와 모우(Moe)의 경우처럼 -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주장이 임상적 지지기반이 취약할 지라도 그들은 교육과 관계된 논쟁지반을 모조리 재정의하고 있다. 몇 년 동안 보수주의자의 공세와 동원이 있은 후에 "한때 단지 희망사항으로 가능할 수도 있다고 여겨지던, 혹은 매우 단순한 극단으로 여겨지던 이상들"이 이제 점차 상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전술적으로(Tactically), 그동안 그들이 상식으로 재구성한 것은 상당히 효과적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솔직히 말하기(plain speaking)" 와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기"와 같은 성격의 언설(discursive)전략이 논쟁과정에서 철저하게 이용되고 있다.(나는 이것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싶지 않다. 상당수의 비판교육학(critical pedagogy) 학자를 포함해서 "진보적인" 교육자들은 이제 이것을 중요한 사안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전술은 일반인의 위치를 "상식"적인 수준에서 제시할 뿐 아니라, 논쟁하고 있는 당사자간에 진실을 배제하거나, "통용되고 있는" 것만을 말하는 암묵적인 공모가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헤른슈타인(Herrnstein), 머레이(Murray)의 유전학과 지성에 관한 터무니없는 "진실"의 선전이나 최근의 허스취(Hirsch)가 주장하듯 "경직된" 학습의 파괴를 위해 진보적 교육자들이 나서자고 하는 "거친" 논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보수적인 문헌은 이러한 주장들 일색이다. 




시장과 성과(performance)



이런 전반적 경향이 어떻게 보수적인 퇴보의 흐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움직이고 있는지 예를 들어- 보이지 않는 손은 당연하게 학교를 더 낫게 만든다는 신자유주의자의 주장 - 살펴보기로 하자. 로저 데일(Roger Dale)은 "시장"이 명쾌한 행동 지침이 아니라 메타포로 작동하고 있다고 상기시켜주었다. 시장은 외연적인(denotative) 것이 아니라 함축적인(connotative) 것이다. 그래서 시장은 시장에 존재하고 시장의 영향을 받고 사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유통될 수 있어야(marketed)"한다. 시장은 탈정치화된 전략에 의해 시장화되어야 하고 규제되어야 한다. 시장은 자연스러우며 중립적이며 효과와 장점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므로 개념적인 정의에서 시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효과와 장점이 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물론 시장은 정치적인 간섭과 관료적인 방식의 부담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와야 한다. 덧붙여서 개인 행위자의 합리적 선택에 근거해야 한다. 그래서 "중립적인" -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 결과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시장과 시장의 효과와 장점으로 인한 보상을 확실히 보증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당연하게 관료적인 효율성과 효과가 있는 기제(mechanism)를 갖추어야 한다. 명확한 성과를 보이기 위해 시장과 관료적인 기제(mechanism)가 결합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지는 의심스럽지만.



아마 여러나라의 시장화 경험을 가장 광범위하게 비판적으로 고찰한 조프 위티(Geoff Whity)는 사실에 대한 허구를 간과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는 여러 나라에 대한 연구검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시장화를 전략적으로 "선택"한 자들이 시장은 학교의 효율성과 반응성(responsiveness)을 높이는데 효과가 있으며 기회가 불리한 아이에게 현재 가지고 있지 않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고 떠들어대고 있는데 이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현재 이런 기대는 실현되리라 보기 어려우며, 게다가 "심각한 사회적, 문화적 불평등을 치료하기 위한 국가의 노력이 전무한 상황에서 개괄적인(broader)정책만 계속된다면" 더더욱 실현될 것 같지 않다. 이어서 "계층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의사결정이 원자화되면 모든 이에게 동등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공적영역에서 사적영역으로 의사결정의 책임을 전환하게 되면 모두를 위한 교육으로 질적 향상을 도모코자 하는 집단의 활동반경이(scope)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내가 간략히 보여주려 하듯이 시장을 통한 "해법"이 포함된 신자유주의 정책이 전통적인 인종과 종족의 피라미드형 계층구조를 전복하기는커녕 재생산할 것이라는 사실과 이것을 연계해 보면 왜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저지되어야 하는가를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face value)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런 정책의 제창자(proponent)의 수사와 상징속에 가려져 있는 숨겨진 효과를 의심해 보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 지적할지도 모를 이번 논문의 한계를 보충하기 위해 진정한 가치를 과거에는 묵살당했던 중요한 연구결과를 제시하고자 한다.




국가와 신자유주의의 개혁



영국의 사례가 여기에 딱들어 맞는데 특히 쳡나 모우와 같은 시장주의 제창자들이 영국에 많이 의존하며, 내가 분석한 경향이 가장 진행된 나라가 바로 영국이기 때문이다. 1993년 영국의 교육개혁법은 시장화 공약을 명문화했다. 지방교육국(LEAs)의 운영위(govening body) 는 현재 공식적으로 매년 "GM(genral market)으로 학교를 바꿀"수 있게 되어있다. (말하자면, 지방학교체제의 통제에서 벗어나 경쟁적 시장을 지향하는 것) 그래서 국가의 강조는 신자유주의 개혁을 지향하라는 압력에 오히려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개혁을 통해 교육과정의 반응성(responsiveness)과 다양성이 유도되기는 커녕, 경쟁적 시장에서의 오늘날 대부분 학교의 전형인 전통적 학교모델과 달라진 것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려울 지경이다. 게다가 학교가 지닌 불평등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지도 못했다. 볼(Ball)과 그의 동료들은 시장주의적 개혁이 "토대"에 어떠한 미친 결과를 광범위하게 분석하여 왜 우리가 이 방향의 개혁을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는지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고 있듯이 시장화된 상황에서는 교육적 원리와 가치가 타협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교육과정의 기획과 학습기회(resource)에 관한 논쟁에서 상업적인 것만이 중요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 시장의 요구와 결합된 "학교별 시험순위비교표(examination league tables)"와 같은 성적공개와 같은 예는 학교가 점차 "능력있는" 학생과 "요구수준이 높은(motivated)" 부모들을 유혹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교는 이런 방식으로 지방체계의 경쟁구조에서 상대적 위치를 올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학생 소비자의 수요에서 학생 자신의 성취로, 학교가 학생을 위해서 하는 것에서 학생이 학교를 위해 하는 것으로, 미묘하지만 - 과거에는 공개적으로 공개적인 논쟁이 되지 않았던- 중요하게 강조점이 전환되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너무 불행하게도 특수장애아동이나 학습장애아로 분류된 학생들의 학습기회 같이 반드시 필요한 학습기회는 배제될 뿐 아니라, 점차 국가의 책임에서 시장과 대중의 책임이 되어가고 있다. "특수장애" 학생의 교육은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expensive) 중요한 순위비교에서 성적을 떨어뜨리까지 한다. 



이런 전반적인 기획(enterprise)과정에서 그들은 영구적으로 시장게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척도와 일련의 목표를 새로이 구축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척 중요한데, 이런 기획의 결과와 그 방식은 학교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고, 척도와 목표를 새롭게 구축한다는 것은 좋은 사회와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두고 어떤 전환을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나는 모든 교육 계획은 정의로운 사회와 훌륭한 학생에 관한 이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구축한다. 광의의 개념으로 신자유주의는 고전자유주의의 - 특별히 고전 자유경제주의자 - 중심적인 신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고전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간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교육의 정치학과 현재 교육이 겪고 있는 전환을 이해하는데 있어 이런 차이가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마크 올센(Mark Olssen)은 아래 단락에서 이러한 차이를 분명하게 분석했다. 전문을 인용한다. 



“고전 자유주의는 개인을 국가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주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국가권력의 행사에 부정적인 반면,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시장의 작동에 필요한 조건, 법률, 기구를 제공토록 함으로써 최적의 시장 조건을 형성하는데 있어 국가의 개입을 긍정적으로 본다. 고전 자유주의는 개인이 자유로운 인간 본능을 가지고 있어 자유가 주어질 수 있다고 본다.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개인을 기업가적이고 경쟁적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고전적 모델에서 이론상 국가의 영역은 보편적 이기주의를(사적 이익을 지향하는 개인주의) - 즉, 개인의 이해관계는 전체적으로 사회의 이해관계라고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 이론과 자유방임주의의(laissez-faire) 정치적 극대화 - 포함한 공리에 근거해서 역할이 제한되고 최소화되었다. 그런데, 고전 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전환되면서 새로운 요소가 추가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환과정에는 이기적인 본성을 가진 존재로서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는 "경제적 인간"에서, 국가에 의해 형성되어 계속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고무되는 "조작적 인간(manupolatable man)"으로 주체의 위상 변화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시대에 이기주의적 주체란 개념은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없어지지 않고, 복지가 보편화된 이 시대에는 오히려 게으름을 필 여지를 감시, 감독하고 "성취도 평가"와 통제 형식을 새롭게 생산하도록 한다. 이 모델에서 국가의 역할 그 자체는 모든 개인을 표준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다. 국가는 개인 각각이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경영하게끔"한다.....“통제 없는 통제”의 과정이 될 것이다.”



볼과 그의 동료들의 연구 결과는 어떻게 국가가 지속적이고 경쟁적으로 대중의 동의를 획득하여 시장화된 개인과 통제의 결합과 같은 이상한 형태의 결합을 이뤄낼 수 있었는지 그 수행과정을 설명한다. 대중적으로 학력수치비교를 공개함으로서 교육시장에서 개인의 비교가치는 결정된다. 높은 성취도를 올린 학교만이 가치가 있다. 그리고 "계속 자신을 경영할 수 있는" 그런 학생만이 학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생겨나게 되는 그 이외의 다른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계발하지 못했다. 볼, 보위(Bowe) 그리고 기어츠(Gewirtz)가 밝힌 계급논쟁이 이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자본



중간계급 부모들은 경제 자본, 사회 자본, 문화 자본의 혜택을 가장 많이 누리고 있는 집단인데, 그것은 우리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매우 열심히 찾고 있는 학교가 있기 때문이다. 중간계급 부모들은 대개 교육의 시장 메커니즘을 개척하고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자신들을 위해 사용하는데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 "그들은 점점 더 갈수록 복잡하고 탈규제화된 선택과 학생모집(recruitment) 체계를 해독하고 능숙하게 다루기 위한 지식, 기술, 연줄망(contact)을 더욱 원하는 것 같다. 규제가 늘어날 수록 비공식적 절차의 이용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대개 중간계급은 자신의 아이들이 체계에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한다." 계급과 인종이 복잡한 방식으로 교차하고 상호작용함으로서 나타나는 결과의 차이는 - 시장화된 교육구조는 종종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존재이유(raison d'etre)를 분명히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인종차별적 교육정책의 숨겨진 표현이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지라도 - "자연스럽게" 계층과 인종에 의한 것이 된다.



사회자본과 경제자본은 다양한 방법으로 문화자본으로 전화된다. 시장화 전략 속에서 여가시간이 더 많은 부유한 부모는 학교를 여기저기 찾아다닐 수 있다. 그들은 한대 이상의 차를 가지고 있어서 "더 좋은" 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키기 위해 전국을 차로 다닐 수 있다. 캠프와 방과후 학교(춤, 음악, 컴퓨터교실 등)같이 문화적 교육기회로 작용하는 "품위"와 "여유"를 줄 수 있는 숨겨진 문화적 교육기회를 "자연스럽게" 아이에게 제공해 줄 수도 있다. 그들이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사회적 문화적 자본은 -누구를 알고 있는가, 교육공무원과 사회적 만남을 통해 얻는 "편안함" - 보이지 않는 강력한 자원의 보고이다. 그러므로 더 부유한 부모들은 시장화된 제도를 해독하고 비공식적인 기술과 지식을 - 부르디외가 아비투스라 부르는 - 자신의 이익을 위해 쉽게 이용할 수 있다고 하겠다. "자신감(confidence)" - 경제적 선택의 기회를 실질적으로 부여하는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암묵적으로 경제적 자원에 의존하는 과거의 선별 결과이다. - 이라 불리는 이런 감각은 시장화된 제도와 협상하는 자신들의 능력을 뒷받침하며 비공식적인 문화규칙을 통해 "체제를 작동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자본이다. 



분명 이점에서 노동계급과 저소득층 그리고/혹은 이민자 부모들은 이런 기술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결국, 착취하고 억압적인 물적 조건에서 앞서가려면 상당한 기술, 자신감, 사회적 문화적 자원이 요구된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상당히 미묘하고, 지적이고, 종종 민감한 방식으로 집단적 유대(bonds), 비공식적인 연결망과 접촉, 체제를 활용하는 능력이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학교와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역사적 요인의 아비투스와 더 부유한 부모들의 아비투스의 조응(match)은 부유한 이들이 하여금 물적 자원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함으로서 결국에는 경제 사회적 자본이 문화자본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영국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와 같다.



학교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례와 폭넓은 권력관계의 유형을 분석한 이러한 주장은 전지구적 시장화모델의 결과에 관한 최근의 종합적인 분석을 뒷받침한다. 긴강은 있지만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정책의 효과적인 결합 결과에 관한 연구조사는 이런 경향이 진행되고 있는 몇몇 나라에서 - 예를 들면, 미국, 영국과 웨일즈,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 벌어지고 있는 국제적 경향을 비교설명한다. 그 결과는 지금껏 말한 주장들을 재확인 하는 것이다. 그런 조사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우려스런 결과를 보여주는 것을 몇가지 살펴보자.




시험성적의 함의



불행하게도 표준성취도시험의 결과는 학교개혁의 "성공"을 측정하는 교육방식으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결코 이것만으로 단순하게 성공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개혁이 학교와 학교의 구성원인 교사, 학생, 행정관료, 지역사회 일원, 지방 활동가에게 전반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오는지 지속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아야 한다. 예를 하나 들면, 시장화된 "자율경영(self-managing)"학교가 여러 나라에서 성장할 수록 학교장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경영을 위한 학교구조를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 즉, 많은 노력이 투입되고 있다. "좋은 학교"라는 대외적 이미지를 유지하고 높이기 위해 더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투여되고 있지만 교육과정과 교육 부분에 투여되는 시간과 에너지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동시에 교사의 자율성과 전문성은 신장되지 않고 노동강도(intensification)만 증가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앞에서 말했듯 학교는 점점 더 비슷해져서 획일화되고, 전통적인(종종 단일문화적인) 일제식 수업방식과 표준, 전통적 교육과정으로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시험성적에만 관심이 집중된다면 진실로 심층적인 전환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우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상당히 불안해질 것이다.



이러한 결과가 발생하는 이유로는 여러 나라에서 신자유주의의 준시장(quasi-market)계획이 대체적으로 국가교육과정, 국가 표준, 국가 승인 체계와 같은 것을 통해서 내용과 행동을 규제하고자 하는 신보수주의적 압력에 의해 승인되기 때문이다. 이런 결합은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일이다. 즉, 두가지 강력한 경향의 결합이 절대적인 필연성을 띠고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권한 축소과 시장에 대한 믿음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국가의 권력 확대와 지식, 가치, 육체에 대한 규제 승인을 중요시하는 경향과 쉽게 결합하는 특성을 보인다.




성취도



이것은 부분적으로 "평가자로서 국가(evlauative state)"의 권력이 증대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것은 초기에는 모순적인 경향을 띨 듯 하다. 동시에 국가가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개인과 자율적 기구에 권력을 점차 양도할 수록 국가는 여전히 주요 영역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내가 초반부에 언급했듯, 고전 자유주의와 현재 신자유주의-시장에서 "경영하는 개인"을 신뢰하는-는 후자의 국가의 규제 권력을 승인한다는 점을 주요한 차이로 한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이 실제로 "스스로를 경영하고 있는가"에 대한 증거를 지속적으로 만들 것을 요구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은 마치 가격, 공정, 경영이라는 상징에 지배되는 빵과 자동차처럼 시장에서 팔리기 위한 상품이 되가며, 교육의 결과는 표준화된 "성취도"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지식, 가치, 행위를 표준화하고 어떤 것을 "합당한"것으로 할 것인지를 공식화 하려하는 신보수주의적 체계 구성 시도와 이상적으로 어울린다. 이점은 다음 장에서 확장해서 다룰 것이다.



사실 우리는 명백히 눈에 보이는 교육기회(access)와 결과의 불평등과 같이 국가가 줄이기로 약속했던 것에 대한 책임을 개별학교, 학부모, 아동에게로 전가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주류경제 집단이 책임져야 마땅한 광범위한 불평등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국가로 떠넘기는 과정의 일부이다. 국가는 정통성(legitimacy)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국가가 이런 위기를 다시 외부로 떠넘기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에 별로 놀랄 필요도 없다.



마찬가지로 학교에 대한 가장 최근의 다른 연구 결과는 놀라운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확연하게 탈중심화된 학교에서 교장은 오히려 지엽적인 권력 행사가 가능할 수 있을 듯 보이지만, 신보수주의적 정책의 내적 공고함 때문에 교장은 "국가에서 제시한 교육과정을 따라 성취도를 제시해야만 하는 입장에 처하게 되어 통제권을 상실하게 된다.” 내가 앞에서 얘기했던 노동강화(intensification)로 인해 교장과 교사는 업무량이 상당히 증대하며 책무성 또한 계속 증대된다. 또한 끝없는 회의 일정에 시달리게 되고, 많은 경우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역량이 더욱 소모되고 있다. 




전통주의(traditionalism)



게다가 영국의 연구조사처럼 시장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교육과정, 교수법(pedagogy), 구조(organization), 고객(clientele), 심지어 외형(image)에서조차 다양성은 독려되지 않았다. 대신 대안적인 것을 지속적으로 가치절하하여 주류모델의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인종, 민족, 계급에 따른 교육기회와 결과의 차이를 지속적으로 악화시켰다는 것 또한 중요한 사실이다.



"전통주의"로 복귀는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전통주의"로 복귀는 비판적인 교수모델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점은 학교에서 문화적이고 비판적인 교수법의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하려 한다면 반드시 알아야 할 요점이다. 이것은 학교에 능력별 계층화를 다시 도입했으며 탈 능력별 반편성(detracking)이 일어날 여지를 감소시켰다. "재주를 타고난" 아이와 "능력이 우월한"(fast track) 교실에만 관심을 기울였으므로,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은 "덜 매력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것의 심각성은 영국의 놀랄만한 학교중퇴율 수치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일이 생기는 원인은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성취율에 대한 엄청난 압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취율에 대한 압력은 특히 시장화된 상황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데 "주요 추진동력은 교육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위티(Whitty), 파워(Power), 할핀(halpin)은 이러한 우려스럽기 그지없는 결과를 분석하여 준-시장(quasi-market)전략의 가장 위험스러운 결과의 하나로 시장에서의 순위를 유지하거나 높이려고 하는 학교에서 "더 좋은 학생 빼가기(cream-skimming)"에 - 특정한 특성을 가지는 특정 부류의 학생에게 입학이 허가되고 학교가 원하는 특정 부류의 학생에 대한 모집을 허용하는 - 가담하는 것임을 보여 주었다. 몇몇 학교는 아시아지역에서 온 학생들을 우대하듯 여자학생을 우대하는 식의 인습(stereotype)을 반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리브해-아프리카 아이들은 분명한 패자였다. 이제 전반적인 결론은 분명하다. "교육기회와 전체 학교의 질 향상이란 목적을 놓고 본다면 현재의 사회적배경에 따른 선택(circumstance choice) [속에서]는/은 계층화를 강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이 학교개혁의 필요성 내지는 가능성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체 학교의 성공 가능성은 "성공한" 학교의 구조적인 특징이 아니라 외인적(exogenous) 사회-경제적 특징을 유심히 살펴볼 때라야 진지하게 모색할 수 있다. 소득재분배로(greater income parity) 가난을 제거하고, 효율적이고 보다 평등한 보건의료정책과 주택정책을 세움으로서, 많은 나라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은폐되어 있거나 때론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근본적인 배제와 지위하락(degradation)이 더이상 진행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시장화된 계획은 부분적으로 "타자(the Other)"의 문화와 육체를 거부하기 위한 구조로서 간주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와 대결함으로써야 비로소 근본적인 발전이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한 인식에 기반하지 않는 비판교육학 논의는 역시 학교가 혼자서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가정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국가 교육과정과 국가 시험



신자유주의 개혁하에서 작동하고 있는 최소 두가지 동력들 사이의 - "자유"시장과 감시의 증대 - 연관에 대해서는 이전 장에서 보았다. "자유"시장과 감시의 증대는 많은 경우 교육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 즉, "생산자"에 대한 일련의 정책과 함께 시장화가 일어났다는 사실로부터 알 수 있다. 생산자에 대한 일련의 정책은 규제가 심했으며 상식을 재구성하는데 유익했다. 국가시험과 성취도가 결합되어 성적 순위비교표로 공개되듯이 생산자와 관련되는 일들은 외부 감독과 규제 그리고 외부 성취도평가로 통합되었으며, 점차 "적절한" 경제자본, 사회자본, 문화자본을 소유한 부모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외부 감독과 규제는 "생산자"(예를 들면 교사)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부모들에게 그들이 학교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신보수주의자들이 잃어버린 과거의 높은 표준, 수양, 권위, "실제"지식으로 "복귀"하는데 필요한 의미와 연관되어 있으며, 전문화된 중간 계급이 경영기술과 효율성을 위임받은 국가의 테두리 내에서 권위적 영역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능력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자와 신보수주의자가 모두 유용하다고 보는 효율적인 경영이 매우 중요하다.



일련의 시장화와 탈규제 흐름과 - 예를 들어 바우처 정책과 선택 정책 - 일련의 규제강화 흐름 - 예를 들어 국가교육과정과 국가시험 - 사이에 필연적인 모순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규제강화의 흐름을 통해 시장구조에서 교육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조타수(steerage)'의 역할을 계속 하게 되는 것이다." 조타수는 국가 표준, 국가 교육과정, 국가 시험 등의 역할을 한다. 이 모든 형식은 현재 미국에서 추진되고 있으며 상당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는 이데올로기 전선에 영향을 미쳐 보수적인 퇴보의 우산(umbrella)아래 내재되어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에서도 점차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나는 [문화정치학과 교육]에서 역설적이게도 국가 교육과정과 특별히 국가가 관장하는 시험은 시장화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첫 단계라고 주장했다. "소비자"시장을 시장답게 만드는 데 필수적인 비교 데이타 조성은 그것을 통해 실질적 구조가 형성되었다. "선택"을 위해 정보를 비교할 수 있는 토대는 이러한 구조가 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규제강화의 형식이 어떤 것인지 논쟁할 필요는 없다. 앞장에서 논의했던 신자유주의 시장과 같이 그것은 영국에서 역시 체계화되었다. 그런 경로를 기록함에 있어 우리가 충분히 고려할만한 중요한 연구결과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련의 국가표준, 국가 교육과정, 국가 시험을 통해 "도덕성이 강화"되는 조건을 제공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규제가 강화되는 방향의 개혁은 공통관심사를 논쟁하고, 쉽게 도덕적 의문대상이 되는 사회적 공간을 생성할 수 있는 공유된 가치와 공통의 정서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상식"으로 여겨지고,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이것이 결정되는가는 도덕성을 강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키게 된다.



영국과 웨일즈에서 제도화된 현재의 평가 전략에 대해 상당히 철저하게 비판하는 연구가들은 국가 교육과정을 둘러싼 투쟁과정에서 발생한 일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깁스와 머피(Gipps & Murphy)는 국가 교육과정과 연관된 국가 평가전략은 점점 전통적 평가모델, 그리고 이면의 가르침과 배움에 관한 전통적 가정에 의해 명백히 지배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평등에 관한 주제는 점점 더 뒤로 밀리고 있다고 한다. 규제의 강화가 진행되고 있는 국가는 통용되고 있는 가치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사회 교육적 정의(justice)에 대한 종합적인 사고를 효율성, 속도, 비용절감의 문제가 대체하고 있다. 신속하게 시험을 치루도록 압력을 행사함으로서 "시험 평가도구 발달 속도는 너무 빠르고, 교육과정과 평가는 너무 규칙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시험이 모든 집단에 공정한지를 보여줄 만한 세밀한 분석과 시도를 행할 시간이 [그곳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덕성이 약화되는" -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개인이 중요하며 사회적 정의는 놔두면 알아서 될 거라는 - 조건은 이곳에서 재생산된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 시장과 국가의 규제강화는 결합되어 매우 "잘 작동한다." 그러나 이것이 작동하려면 자유시장, 장점, 효과라는 상징이 엄연히 만들어진 다른 실재를 은폐해야 한다. 한편 이것은 사회 문화적으로 비판 교육학을 더욱 중요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또한 실제 비판 교육학이 실행되기 더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전략적으로 사고하기



이 논문에서 현재 몇몇 나라에서 진행중인 교육"개혁"의 효과에 진지한 문제제기를 던졌다. 단지 한 나라의 사례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 시장 전략과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와 중간관리계급의 규제 강화계획이란 두 가지 연관된 전략에서 숨겨진 면을 서술하기 위해서 영국의 사례(들)을 검토했다. 또한 허버트 클리바드(Herbert Kliebard)의 역사적 분석에서 힌트를 얻어서, 교육정책과 그 교육방식을 둘러싼 사회적 장에서 교육의 전망과 사회의 전망을 달리하는 상이한 이해 관계들이 어떻게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지 서술했다. 이 과정에서 권력의 영역에서 드러난 몇몇 복잡하고 불균형한 점을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도덕성은 "강화"되지 아니하고 "약화"되었다. 또한 지배적 교육과정과 교수과정의 형태와 이데올로기가 재생산 되었고 그것을 승인하는 사회적 특권 또한 재생산되었다. 만약 우리가 심각하게 전환되고 있는 우파의 이러한 전략에 정직하게 맞서지 않고 또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면, 대항 헤게모니적 상식의 구성이나 대항헤게모니적 동맹을 구성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시장화와 국가규제 강화라는 이상한 결합이 성장하고, 유사한 교수법과 "전통적인" 교육과정과 가르침으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투쟁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지배계급의 능력과 이에 병행해서 일어나는 상식의 이동과 같은 것은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대신 솔직하게 자기반성적으로 맞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잠시 내가 말한 것 중에서 숨겨진 모순(paradox)을 지적하고자 한다. 최근 나와 그리고 다른 연구자들의 상당한 연구조사는 보수회귀의 경향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그런 관점 속에는 반드시 인식해야 할 위험이 있다. 역사와 정치 그리고 우파의 사회적 교육적 움직임과 "개혁"의 방식에 관한 사례 연구를 통해 그런 정책과 교육방식이 가져올 모순적이고 불균등한 결과를 알 수 있게 했다. 또한 실증적 기반위에서 사회정의에 관한 주장을 재정의하게 했다. 이것은 유용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잠재적인 결과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의제로 교육적 쟁점을 형성했다. 신자유주의자와 신보수주의자는 시장, 선택, 국가 교육과정, 국가 시험, 표준과 같은 범주를 통해 구축된 영역에서 논쟁을 이끌어갔다. "무엇인가(What is)"에 대한 분석은 "무엇일수도 있는가(What might be)"에 대한 분석을 소홀하게 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의 전망, 정책, 실제,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실현가능한 대안들에 관해서 종합적이고 거시적으로 토론하지 못하게 되었다. 



역사의 진보에 역행하는 교육정책을 파괴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파는 중요한 상식의 변화가 교육 투쟁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도덕성의 "강화", 민주주의의 "강화"를 오늘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의미로 재구성함으로서, 교육을 다시 세울 수 있는데 일조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아마 몇몇 대답은 [민주적 학교(Democratic Schools)]와 같은 책이나 [학교를 다시 생각한다(Rethinking Schools)]는 출판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제안하고 있는 정책과 실재에 대해 비판적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 가지는 확실한데, 실재에 대한 시장의 수사(rhetoric)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절대 대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두번째] "교사를 모두 없애라 : 홈스쿨링의 문화정치학"

(원제 : "Away With All Teachers : the cultural politics of home schooling")


* 2001년 2월 26일 전교조 참교육연구소 등이 후원하고 진보교육연구소와 교육비평이 주관한 행사인 <마이클 애플 초청 강연회> 자료집 “마이클 애플과 한국교육운동의 만남-세계화시대의 한국교육개혁과 진보적 교육운동의 길찾기” 에 수록한 번역글



요 약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홈스쿨링을 지향하는 움직임은 교육 ‘개혁’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과 관련이 있다. 공중파 매체는 점점 홈스쿨링에 대해 많이 언급하는 추세이며, 홈스쿨링을 받는 층의 규모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더 넓은 지형에선, 국가의 통제(간섭)에 대해 반대하는 담론들의 유행과 ‘학교는 실패했다’는 주장의 끊임없는 확산이 홈스쿨링의 자극제이다. 이들이 거론하는 교육문제의 원인으로는- ; 우선, 교사교육의 문제가 있다. 교과의 내용에 있어서나 교수방법에 있어서 준비가 미흡한 교사를 교사 양성기관이 배출해낸다는 말이다. ; 공립학교(국가가 재정을 지원하는 학교)들이 채용해 온 ‘진보적’ 교수 모델들은 현실적합성이 떨어진다.; 공립학교들은 ‘전통적’인 것들, 구체적으로 전통적인 문화, 종교적 앎, 신념, 가치를 가르치지 않는다. ; 그리고 공립학교들은 보수적인 학부모들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관료화되어 있다. 홈스쿨링의 지지자들은 대개 근본주의자들로서, 미국 및 기타 지역에서 점차 그 세력이 커지고 있다. 그들은 미국 내에서 전국적 연결망을 형성해왔고, 신자유주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우파 헤게모니 연합과 결합해있다. 이 우파 연합은 교육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구조조정(재구조화)을 시도한다. 이 글에서는 홈스쿨링 운동이 어떻게 흔히 생각해온 것보다 강력하고 위험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는지를 더 넓은 맥락에서 보여준다. 홈스쿨링 운동을 견인하고 홈스쿨링 운동에 상당한 추진력을 제공하는 보수주의자 및 권위주의적 인민주의(대중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종교적, 사회적 움직임 속에서 그리고 이것과의 연관 속에서 홈스쿨링을 파악한다. 이 연결들은 여타의 보호무역론자들에게 자극을 받았으며, 복지국가(정부) 성장의 역사와 그에 대한 우려에서 힘을 얻었다. 그리고 이 글은 홈스쿨링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홈스쿨링 운동이 어떻게 상처를 주게 되는지를 지적한다.


서론

대중매체에서 이데올로기적 변화들을 긍정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변화가 점차 수용되고 있음을 엿보게 해주는 단서의 하나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홈스쿨링은 우리의 의식 내에 확고하게 자리잡았다고 보겠다. 전국단위의 신문, TV, 라디오, 판매부수가 높은 잡지 등이 홈스쿨링을 다루어 왔다. 홈스쿨링은 보통 실패로 판정된(혹은 이런 매체에서 실패로 판정한) 학교를 근간으로 하는 공교육체제에 대한 강력한 대안, 이를 테면 ‘구세주’로 제시된다. 공립학교는 실패했노라고 아주 쉽게 단정짓고 심각한 문제거리로 비추는 반면, 홈스쿨링에 대해서는 매우 호의적이다. 물론 나는 이에 대해 결코 기대하지 않는다.

홈스쿨링에 대한 기존의 자료들은 정확하지 않을 때도 많으며, 자료를 직접 수집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홈스쿨링의 규모에 대해서는 National Home Education Research Institute (전미 가정 교육 연구소)의 자료를 통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 자료에 따르면, 1997-98년도에 미국내 150만명의 아동이 홈스쿨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90년 이후 매년 15%가량 증가해왔다고 추정한다. 물론 이 자료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National Home Education Research Institute (전미 가정 교육 연구소)는 홈스쿨링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성향의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숫자가 상당한 규모라는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하다.

짤막한 글로 홈스쿨링과 관련된 수많은 이슈들을 하나하나 충실히 다루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이 지면을 통해서는 홈스쿨링과 관련되어 나타날 위험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데 목적을 둔다. 물론 일부의 특정 아동들과 가정은 홈스쿨링을 함으로써 이득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더 넓은 문제를 짚어보려는 것이다. 나의 관심은 미국에서 시도되고 있는 강도높은 구조조정(재구조화) - 나는 현재의 구조조정이 위험하기 그지없다고 믿고 있다 - 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내 관심은 공공성(혹은 공익에 대한 책임감)을 위축시키는 방식들에도 닿아 있는데, 이 추세를 내버려둘 경우 사회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게 될 것이다. 홈스쿨링과 관련된 위험들을 설명하려면--

첫째, 홈스쿨링에 동력을 제공한 더 큰 움직임 속에 홈스쿨링을 자리매김할 것.

둘째, 홈스쿨링이 보호주의자(보호무역주의자)들의 자극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줄 것.

셋째, 홈스쿨링을 적극적 정부(복지국가 정부) 성장의 역사와 그에 대한 관심에 연관지을 것.

마지막으로, 홈스쿨링이 실제로 어떻게해서 다른 많은 학생들, 즉 홈스쿨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학생들에게 손상을 입히는지를 짚어본다.

다음 얘기부터 미리 밝혀둔다. 자녀의 교육경험을 너무나도 배려하는 나머지 이에 직접 개입하려는 부모들의 노력 그 자체는 꾸짖거나 짓누를 일이 아니다. 오히려 칭찬 받을 만한 일이다. 더불어 현재의 공교육(공립학교 교육)을 거부하는 개인들을 어떤 이데올로기-위험 천만한 듯이 보여서 자동적으로 타당한 관심사를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를 분별없이 선동하는 자들이라고 상투적으로 정형화시켜버리는 것은 금물이다. 사실상, Cultural Politics and Education(Apple, 1996)에서 보여주었듯이, ‘반-학교 정서’가 확산되는 현상의 이면에는 복잡한 이유들이 있다. 그러한 믿음 속에는 나쁜 ‘의미sense' 뿐만 아니라 좋은 ‘의미sense’의 요소들도 들어 있다. 이를테면, 학교체제는 지나치게 관료화되어 있으며, 학부모나 지역사회가 가진 관심사에 별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혹은,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때도 있는데, 무엇이 ‘공식적’인 지식으로 승인되며, 그 지식의 소유 주체는 누구냐라는 문제가 제기될 때 특히 그렇다. ‘인정의 정치학recognition politics’에 대해서는 좌파든 우파든 비슷한 주장을 펼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대한 이런 류의 비판들은 정치적 색깔을 막론하고 몇몇 측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Fraser, 1997) 사실상, 제도교육에 대한 이런 류의 비판들이야말로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교육가들로하여금 학교(공립) 교육과정과 교수방법을 지역사회에 적합한 방향으로 이끌게 하는 구실을 해왔다.(Apple & Beane, 1995, 1999)

그러나, 설사 그들(이를 테면 홈스쿨러들)이 가진 비판의 취지가 제도교육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위가 갖는 실질적 ‘효과가 반드시 좋을 수만을 없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적 신념과는 별 관련이 없는 홈스쿨러들도 많이 있지만, 상당수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결정을 내린 사람들이다. 가장 열성적인 학부모들은 종교적 신념에 터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그리고 이 점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중요한 ‘의미 있는 쟁점’을 일으킨다고 보아, 이 글에서는 주로 이들 집단에 촛점을 맞추어 논의한다.

많은 홈스쿨러들은 자신이 가진 신앙에 따라 움직이는데, 가족, 성별관계, 합법적 지식, ‘전통’의 중요성과 의미, 정부의 역할, 그리고 경제에 대한 성서적 이해가 그들의 신앙을 이룬다. 이들(신앙에 기초하여 행동하는 홈스쿨러들)은 ‘보수 회귀conservative restoration’라고 지칭해온 부류 안에 포괄된다. ‘보수 회귀’ 내에는 강력한 정치적 제휴가 형성되어 왔는데, 교육이라든가 사회 여러 분야의 특정 사회정책들에 대한 기호별로 ‘대중’이 다양한 분파로 갈라지는 와중에 형성된 제휴들이 ‘보수 회귀’ 안에 포함되어 있다. 다음 절에서는 맥락을 넓혀서 이를 파악한다.



교육과 보수적 현대화

오래 이어지는 교육변화는 (교육자와 교육전문가의 작업에서가 아니라) 거대한 사회변동, 다시 말해서 주요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제도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나가는 거대한 사회변동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과거 수십년 동안의 교육개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색인종 및 여성 집단들이 문화적 인정과 경제적 재분배를 위해 벌인 기나긴 투쟁의 맥락에 교육을 자리매김해야 한다.(Fraser, 1997을 볼 것) 국가의 교과서 채택정책과 같이 당연시되는 것조차도 - 국가의 교과서 정책은 ‘공식적 지식’을 정의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 가운데 하나이다 - 폭넓게 확산된 인민주의(populism)와 anti-nothern 운동, 그리고 특히 문화와 권력을 향한 계급과 인종 투쟁이 한 세기 전부터 미국 내에서 정치조직화, 혹은 재조직화된 결과이다.(Apple, 2000) 그러므로 지금 교육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강력한 사회 운동에게서 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운동들 가운데 일부는 ‘민주주의와 평등의 확장’을 이끌어내게 될 테지만, 나머지 운동들은 사회․문화적으로 퇴행적인데다가, 민주주의와 평등의 의미에 있어서 근본적 전환을 담고 있다. 불행히도, 후자가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의 흐름으로 대두하고 있다.

그러한 우경화는 우파들이 지난 수년동안 풍부한 재정 지원과 독창적인 이데올로기적 노력을 기울인 끝에 제휴의 기반을 넓혀 얻은 결과이다. 소위 ‘신 헤게모니 블록’이라는 기술적 용어로 지칭되는 이 새로운 정치적 제휴는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실정이다. 왜냐하면, ‘상식을 놓고 벌어진 싸움’에서 유리한 입지를 잠식해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말하자면, 신 헤게모니 블럭은 상이한 사회적 경향들과 시도들을 독창적으로 꿰매 붙여서, (개인적 경험에서 터득한 대로) 복지, 문화, 경제, 교육과 관련된 쟁점들에서 자신의 총지휘 산하로 이들을 조직해왔다. 이 새로운 블럭이 교육 및 사회 정책에서 견지하는 목표는 아마도 ‘보수적 현대화’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알맞을 성 싶다.(Dale, 1989) 보수적 현대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소비행위에만 축소되었고, 시민의식은 소유중심적 개인주의로 그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원한에 기초한 정치학과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게 밀고 나왔다.

이 새로운 블럭은 몇몇 거대 집단들로 구성된다.(상세히 알고 싶으면, Apple, 1996 참조) 신 자유주의자들이 그 첫번째 구성집단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제, 정치 지배 엘리트들로 대표되는데, 이들이 가진 의도는 경제 및 경제와 관련된 제도들을 ‘현대화’하는 데 있다. 그들은 시장과 소비자의 선택이 ‘우리’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사적인 것private'은 필연적으로 선(善)이며, ’공적인 것public‘은 필연적으로 악이기 때문이라며 이(시장과 소비자의 선택)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이들은 바우처 및 개인의 선택권 보장 계획을 강력히 지지한다. 그런 식의 교육정책들이 바로 불평등을 창출해낸다는 경험적 증거가 명백한데도, 대체로 이 집단이 새로운 정치적 제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 새로운 블록을 일종의 이데올로기 우산이라고 가정하면, 이 우산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건 바로 신자유주의자들이다.

이 블럭의 두번째 구성집단은 신보수주의자들이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일관되게 보수적인데, 이들은 ‘높은 성취기준’, 규율(훈육), ‘진짜real’ 지식, 그리고 사회진화론적 형태의 경쟁을 바란다. 아주 낭만화된 과거에 대한 향수가 이들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 과거에 대한 향수는 종종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고전이나 ‘진짜’ 지식으로서의 위치가 과거의 격렬한 투쟁을 통해 획득한 산물임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혹평하는 새로운 교육과정과 문화 요소들 만큼이나 고전이나 ‘진짜’ 지식도 위험스럽고 윤리적으로 문제시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들은 크게 잘못 인식하고 있다.

세번째는 다수의 백인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국가를 불신한다. 그리고 안전, 가족, 성gender, 그리고 가정내의 성․연령관계, 그리고 전통적인 근본주의적 종교의 가치와 지식에 관심이 있다. 이들은 교육/정치/문화 영역에서 힘을 소유한 권위주의적 인민주의자들 내부의 실세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공립학교에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가 만연하게 되면 자신들의 특권(공민권)을 박탈당하리라고 여긴다. 이때문에 이들은 신자유주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에게 아래로부터의 상당한 지지를 보태준다. 이들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자본의 도주(자본 이전), 그리고 경제 구조조정으로 생계가 매우 위태로워진 민중들 중에도 있다.

많은 홈스쿨러들이 위의 세가지 경향에서 발생한 믿음을 모두 조합한다.; 그렇지만 이중 세 번째가 홈스쿨링 운동을 상당부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탄의 위협

공교육은 우파적 기반위에 서있는 많은 이들에게 주된 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들의 생각으로는) 세속적 교육(대중적 공교육)은 우리 아이들을 ‘괴물’로 변질시키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사상(관념)을 의문시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아이들이 ‘우리’에게 등돌리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공립학교교육에 대한 정확한 우려들 - 지나친 관료주의적 속성, 통일성이 결여된 교육과정, 삶과 희망과 지역사회의 다수문화와 괴리된 교육과정, 기타 등등 - 은 개인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한 우려들과 연결되곤 한다. 그래서 Elaine Pagel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멀리 있는 적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는 적들과의 관계 속에서 가장 무서운 사탄의 위협을 정의해 왔다.(Pagel, 1995) ‘사탄이라는 적이 가진 가장 위험스러운 속성은 그가 비록 우리랑 비슷해 보일지라도, 결코 완전히 변하는 법이 없다는 데 있다’(Kintz, 1997, p. 73에서 인용). 일찌기 Beverly LaHaye-보수주의적 활동가-가 페미니즘의 대두경향에 대항하는 조직을 세워야한다고 호소한 것에서 이러한 두려움의 뿌리 가운데 일부를 발견할 수 있다. Concerned Women of America(국가를 걱정하는 여성들의 모임)을 후원한 그녀는 가족, 국가, 종교에 대해 자신이 품은 관심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나는 진실로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독교 여성들이 합일과 목적의 정신으로 집결하여 가족의 권리보호에 나서라고 부르고 계심을. 나는 지금이야말로 교리적 차이를 잠시 접어두고서 미국을 정신적으로 새롭게 하는 일에 함께 정진해야 할 시기라고 믿는다. 바로 우리 여성 말고 그 어느 누가 아이들과 가정(집)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여성만큼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시간과 직관과 그리고 의욕을 쏟는 사람이 또 있을까? (중략) 그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혹은 휴머니스트라고 부를 지 모른다. 이들이 어떤 딱지를 붙이고 있는 지는 별로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그들 대다수는 윤리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려 하고 있으니까.”(Kintz, 1997, p.80에서 인용)



위의 인용문을 통해, 이들이 무엇을 악마의 위협으로 보는지 그리고 이로 인해 무엇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두려움, 즉 국가/가정/가족/아이들의 ‘순결성’, 종교적 가치, 그리고 성역할 관계에 대한 <전통적 관점이 무너지는 것에 대한 불안>은 윤리 지침과 개인의 자유가 파괴되는 것에 대한 보편적 공포 속으로 들어가 그것과 함께 꿰매어진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 주변에서 무너지고 있다. 붕괴의 원인은 지구화된 경제를 경제적으로 파괴하는 정책에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경제 엘리트의 결정에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소중한 전통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내다팔기 위한 상품으로 전락시켜버리는 상품화 전략 때문도 아니다. 되려 다른 곳으로 붕괴의 원인(책임)을 떠넘겨버린다. 위에서 나열한 힘들(자본의 세계화, 상품화)로 줄곧 타격을 입어온 제도들과 민중들-공공부문, 학교교육, 유색 빈민층, 여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해버린다. 오히려 이들은 공적 영역에서 배제당해온 민중들의 희망과 꿈에 보다 민감하게 응답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수세기동안 투쟁해온 사람들인데도!

다만, 이글의 초반부에서 언급했다시피, 이러한 운동에 합류되어 있는 개인들을 상투적으로 정형화시켜 바라보지 않는게 중요하다. 예컨대, 우파 운동 내의 남녀 활동가 상당수는 페미니즘의 일부 요소가 여성이 처한 조건을 전반적으로 개선하는데 기여한 바가 있다고 믿는다. 여성활동가들이 여성에 대한 임금차별 및 여성의 직업기회 확대에 집중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다수가 그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권위주의적 인민주의자들은 대개 페미니즘과 세속적(대중적)인 제도들을 신의 섭리와 단절하려는 움직임으로 본다. (권위주의적 인민주의자들의 눈에는) 페미니스트들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며, 가족과 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법으로 보장된 시민권의 여러 측면 내지 공립학교 교육과정의 많은 측면들, 그리고 세속(대중화된) 사회는 두루두루 잘못 투성이일 뿐이다. 고로, 예컨대 미국의 헌법을 문자 그대로 신성한 영감에서 얻어진 구성물로 본다면, 국가의 핵심은 공공 제도가 아닌 전통적 가족-신께서 선택한 기본 단위로서-이며, 이는 헌법의 보호를 받아 마땅한 중핵적 사회단위이다.(Kintz, 1997, p.97) 문화적 분열이 나타나는 시기, 즉 전통이 위협에 직면해 있고 이상적인 가족이 외부에서 생겨난 위험에 전보다 훨씬 더 노출되어 있을 때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최선의 방책은 우리의 가족들과 아이들을 보호하는 일이다.

이런 식의 종교적 요소들이 없다해도, 홈스쿨링 운동에는 방어적 자세가 팽배해 있는 게 분명하다. 여러 면에서, 다른 사회영역에서 성장하는 ‘개인화된 의식’이 홈스쿨링 운동에 반영되어 있다. 그것은 일상적 삶에서 점점 더 ‘교외화(郊外化)’가 확대되는 데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본질에 있어서, 홈스쿨링은 외부와 차단된 공동체나 마찬가지이며, 이웃/여가/공원 등등 수많은 것들이 개인화되는 현상과 비슷하다. 홈스쿨링은 물리적(신체적), 이데올로기적으로 ‘안전한 지대’를 보장해준다. 이와 관련하여, Linda Kintz는

“시민들은 도시의 범죄/세금/저열한 서비스, 그리고 형편없는 학교를 걱정한 나머지 도시를 버리고 떠나려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외부와 차단된 지역 공동체가 점차 유행한다. (중략) 지역사회를 요새처럼 만들고, <피난처에 대한 사람들의 갈구>를 반영한다. (중략) 그들은 자신의 세금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에게 더 많이 쓰였으면 한다. (중략) 게다가, 그들은 이웃들이 자신과 비슷하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러한 공동체 특유의 사회적 동질성’을 낙으로 삼는다.”

‘cocooning’은 단순히 ‘도시’(위험과 이질성의 은유)의 문제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cocooning’은 도시의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문화적․지적 다양성(이질성), 복잡성, 불명료함, 불확실성, ‘타인’과의 근접 등 이 모든 것들이 기피 대상이다.(Kintz, 1997, p.107) 도시를 대신하는 것은 교묘하게 꾸며진 목가적이고, 산뜻하며 잘 계획된 세계이다. 사물들(그리고 사람들)은 제자리에 위치해 있고 현실은 안전하고 예측가능한 세계.

물론, 홈스쿨링 운동에 반영된 요소는 이보다 다양하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여러 갈래로 쪼개지고 있는 보편적인 미국사회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미국사회의 축소판격이다. 미국사회가 거주지, 인종, 경제적 기회, 수입에 따라 점점 여러갈래로 분리되어 감에 따라 ‘깨끗함purity’을 점점 더 많이 축구하는 경향이 생기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발견된다. 상층계급들은 자기 자식을 명문(엘리트) 사립학교에 보냄으로서 ‘깨끗함'를 충족시키려는 경향이 점점 커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 거기에서 이웃관계는 소유한 부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 거기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인, 정통유태교인 등은 오로지 자기들끼리만 소통․교류하고, 자식들은 사립 종교학교에 보내거나 집에서 교육시킨다.(Kintz, 1997, p.108) 갈등, 불확실성 및 타인의(이질적인) 주장과 문화로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세계-내가 이미 사용한 말로 표현하면, cocooning-가 바로 이상(理想)이다.

그러므로 홈스쿨링은 여러 모로 인터넷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인터넷에서는 특정하게 분화된 영역에 흥미를 가진 이들끼리 모여 완벽한 ‘가상 공동체’를 창조할 수도 있다. 인터넷은 개인에게 여러가지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는데, 우선, 인터넷은 정보를 ‘사유화’(개인전용화) 할 수 있게 해주며, 인터넷을 통해 개인적 관심사와 관련된 지식이나 정보를 선택적으로 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많은 (시사)해설자들이 인식하고 있다시피, 극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주문식 삶’은 이미 많이 허물어진 지역 공동체의 유대를 그 근본부터 훼손할 지 모른다. Andrew Shapiro가 말했듯이,



“공통 경험이 [지역 공동체의 형성에 있어서] 핵심요소라는 점은 자명하다.; 공통 경험 없이는 상호 이해, 감정이입(공감) 그리고 사회적 유대(단결, 응집)의 기회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공통 경험)은 분명히 ‘개별화의 진전’으로 인해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 정보 공유가 결핍된 상태에서는 개개인이 민주적 대화의 출발점을 갖기가 불가능하다.”(Shapiro, 1999, p.12)



많은 공립학교들이 분명히 결점들을 안고 있다해도, 공립학교들은 아주 최소한이나마 ‘사회에서 일종의 접착제 구실을 하며, 다언어적이고 점점 다문화화(多文化化) 되어가는 미국사회에서 ‘보편 문화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Shapiro, 1999, p.12) 그러나 여하튼 그것을 개별화라고 부르든 ‘cocooning'이라고 부르든, 홈스쿨링 운동이 ‘자유’와 ‘선택’을 추구하는 가운데 이러한 공통분모들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와 같이 독특한 자유의 의미 구성은 주목할 필요가 있는 부분인데, 왜냐하면 보수주의가 <자유에 대해 갖고 있는 강박증> 속에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이와 같은 강조에는, 역설적이게도, 여기저기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Kintz, 1997, p.168) 공립학교를 가치롭게 여기기도 하지만, 위험한 장소, ‘통제 밖의 세계’라며 꺼려한다. 많은 홈스쿨러들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믿음을 위해서도 공평하게 시간을 배정해야 한다는 데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공립학교교육을 거부한다. 그들은 ‘평등’을 원한다. 하지만 그것은 특정한 관점에 터한 평등의 비젼일 뿐이다. 왜냐하면, 평등에 대해 흔히 ‘획일화’로 이해한다는 점은 통제를 행사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한 두려움과 짝을 이루어 이들이 굉장히 불안해하는 요소이다.(Kintz, 1997, p.186)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꺼려하는 획일성을 보수주의 프로젝트가 지원하는 종교적․문화적 동질성과는 구분하여 사고한다. 그것은 매우 다른 형태의 획일성이다-‘우리는 모두 똑같다’ 다시 말해 ‘획일화되고 있다’는 말은 실제로는 종교적인 독자성의 상실을 푸념하는 말인 까닭에 이 운동의 내면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있다.: 우리는 모든 이가 ‘우리’(→이는 ‘기독교 국가’를 가리킨다 ; 정부는 ‘보다 높은 권위’ 앞에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처럼 되기를 원한다. ;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는 것에 대한 권리(=‘차이’에 대한 인정)’을 원한다-신(神)의 선택을 받은 집단이 된다는 것을 바탕에 깐 차이. 획일성은 우리의 특수성을 약화시킨다. 어떤 이가 신이 선택한 집단, 즉 선민(選民)의 일원이며 따라서 다른 백성들과 ‘다름’을 자각하는 것과, 누군가가(즉 그 선민들이) 옳다는 것이 너무 확실해서 세계가 누군가의(즉 그 선민들의) 이미지에 맞게 바뀌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것 사이에 흐르는 긴장은 권위주의적 인민주의자의 자극 위에 있는 중심적 모순 가운데 하나이다. 몇몇 홈스쿨러들의 경우, 이러한 역설은 그들의 ‘차이’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자기 자식이 공립학교를 그만두게 함으로써 해결된다. 그리고, 여전히 다른 이들의 경우에는, 이는 (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아이들이 이후 세상으로 가서 계속해서 선택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할) 그리스도 신앙으로 무장하게끔 준비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성스럽지 못한 세계에 우리의 통일된 믿음을 갖고 갈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를 더 잘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의 ‘독자성’과 우리가 가진 ‘차이’를 주장하게끔 내버려 두라는 주문이다.



국가에 대한 공격

특수성의 상실과 ‘잘못된 방식’으로 획일화되고 있다는 것, 이 두가지 모두에 대한 두려움의 바탕에는 다음과 같은 의식이 깔려있다. 즉, 국가는 매우 강력한 방식으로 우리의 일상 생활에 끼어들고 있고, 그 방식은 더 많은 손실을 유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홈스쿨링의 성장은 공적 영역(일반적으로는 공적영역, 특정하게는 정부/국가)에 대한 공격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펼쳐졌느냐는 맥락과 연결짓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홈스클링 운동의 배경에 깔려있는,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 반대의 추진력를 더 잘 이해하려면, 이러한 추진력을 긴 역사사회적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몇가지 역사적 사실과 이론을 찾아보자.

이것을 푸는 열쇠 중 하나는 ‘관리적 국가’ - Clarke와 Newman이 이렇게 부름 - 의 발달이다.(Clarke와 Newman, 1997) 이는 관료적 행정과 전문직주의가 조합된 적극적인 복지국가였다. 국가의 조직은 특정한 조정 규칙의 적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그러한 국가의 특징은 관례화와 예측가능성이다. 이것은 두번째 바람직한 특성과 짝을 이루었는데, 편중 인사와 정실주의가 아닌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인격적 중립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관료적 관례화와 예측가능성은 전문적 판단에 대한 강조에 의해 균형이 잡히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교사와 행정관료 등 관료적 통제를 받는 전문가들은 그들의 훈련과 자격에 기초한 자율성의 요소를 여전히 가진다. 그들이 공정하고 불편부당하게 행위한다는 전제하에서, 그들의 기술과 판단은 신뢰받아야 하는 것이다. 교사 같은 전문가들은 국가를 ‘접근가능하도록’ 만들었는데, 단지 중립성을 보이는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공공선’을 촉진하고, 개인들과 가족들을 ‘돕기 위한’ 행위를 익명적인 방식으로 행함으로써 그런 것이다.(Clarke와 Newman, 1997, pp. 5-7)

물론, 그러한 관료적이고 전문적인 규범(기준)은 단지 ‘의뢰인’에게만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규범들은 국가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국가를 보호하는데 기여했다.(국가는 불편부당하며, 공정하고, 모든 이들의 이해관계 내에서 작동한다.) 또한 그 규범들은 전문가의 판단을 '비판적 숙고로부터 격리시키는 데에' 기여했다.(전문적 지식의 소유자로서, 우리 - 교사들, 사회사업가들, 국가 공무원들 - 는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뢰받아야 한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말미에서 1970년대 중반정도까지는, 적극적인 복지국가가 정당하게 여겨지는 과정으로서 ‘정착’과 절충이 있었다. 그것은 삼권 분립에 의해 지탱되었다. (광범하게는) 양당체제가 국가가 사회생활의 보다 넓은 부분을 제공하고 관리하게끔 국가를 후원했는데, 때때로 국가는 정당정치의 상부에 놓였다. 관료적 행정은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해 불편부당하게 작동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국가에 고용된 전문가들, 이를테면 교사와 다른 교육가들 같은 이들은 전문적 지식을 공공성을 위해 사용하도록 거기에 존재했다.(Clarke와 Newman, 1997, p.8) 이러한 절충(타협)은 널리 수용되었고 공립학교 등의 공공기관(제도)들에게 강력한 지원 조처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대체로 절대다수의 민중은 학교와 여타의 국가 기구들이 전문적이고 공평하게 공공선을 위해 기능한다는 믿음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협(절충)은 경제 위기가 심화되고 1970년대 이후 희소한 자원(경제, 정치, 문화 자원)을 놓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심각한 공격에 직면했다. 보수주의 운동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아주 냉소적이고 교묘한 방식-그리고 재정지원이 충분한-을 동원해가면서 이 위기를 이용했다. 소비자의 선택권 행사 기회를 무시한다며 국가를 비판했다. 복지국가는 행위에 대한 책임을 소홀히 하는 이들을 위해 자선사업을 하느라고 시민(세금납부자로서의)을 기만한다는 인상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하층 계급 출신의 ‘구걸꾼’들은 성적으로 문란하고, 비윤리적이며, 게으른 집단으로 부각되었고,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하며, 도덕적인 ‘우리들’과 대비되었다. 필경 그들은 우리 모두를 고갈시키며 그들에 대한 지원의 후원자인 국가는 가족 그리고 전통적 윤리를 붕괴하게 만들 것이라고 가정한다.(Apple, 2000) 이러한 주장들은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지만,(예컨대, Fine와 Weis, 1998 참조) 꽤 효과를 보았다.

신 자유주의와 신 보수주의가 봉합되면서 이후 그들 특유의 국가에 대한 일련의 비판들이 이어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국가는 더이상 정당하고 중립적인 공익의 버팀목이 아니었다. 대신, 복지국가는 지역(그리고 가족)의 자원을 경제적으로 고갈시킬 뿐만 아니라 국가의 쇠퇴를 앞장서서 대행하는 기구일 뿐이었다. Clarke와 Newman의 말을 옮긴다.



“관료들은 규정이 갖는 익명성 그리고 선택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관료적 형식주의’ 뒤에 숨어 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용으로 관료주의 왕국을 건설하며, 독점적 지위를 무기로 ‘현실 세계’와 달리 경쟁의 무풍지대에 살고 있다. 이기적인 동기에 따라 움직이고, 고객으로 대접받고 싶어하는 백성들을 향해 권력을 행사하며, ‘전문가가 최고로 잘 안다’는 모호한 주장을 되풀이 하며 선택권을 무시하려 든다는 혐의로 전문가들은 고발당하고 있다. 더 나쁘게는.... 자유주의... 는 개인의 책무성과 가족의 권위를 토대부터 갉아먹는 것으로, 그리고 만민평등주의, 구별에 딴지 거는 정책들, 도덕적 상대주의 혹은 아동 중심주의 부류와 같이 과도하게 유행을 타는 것으로 치부된다." (Clarke와 Newman, 1997, p.15)



이러한 도덕, 정치, 경제에 대한 우려는 공교육(공립학교교육)쪽으로 쉽게 옮겨갔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학교는 일상 생활에서 매우 밀접한 공적 제도(기구)로서 자리잡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립학교교육과 그 내의 교수, 교육과정은 공격의 중심 표적이 되었다. 교육과정과 교사들은 공평하지 않았으며, 소수정예주의자(엘리트주의)들이었다. 학교체제는 타인의 윤리를 ‘우리’에게 강요했다. 그리고 애국적이고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진짜 미국인’은-그밖의 모든 이와 대립되는-고통을 감수하고 있으며, 새로운 피억압 집단이 되었다.(Delfattore, 1992) 이러한 주장(견해)은 편집증적 스타일을 가진 미국 문화정치학의 장구한 역사와 조화를 이루는 한편 종종 매우 부정확한 고정관념에 편승하여 많은 이들이 느끼는 깊은 소외감을 겨냥한다.

물론 이러한 국가통제 반대론의 상당부분은 노동시간은 짧은 반면 긴 방학을 누리면서도 돈은 지나치게 많이 받아먹는 ‘무능한(자질이 부족한)’ 교사를 표적으로 한 미디어의 끊임없는 주목과 공공연한 선동에 의해 가열되었다. 보수주의자의 학교에 대한 공격-자신들이 멋대로 추정한 비효율, 재정자원의 낭비, 그리고 경제와 긴밀하게 연결을 맺지 않는다는 점 등을 내용으로 하는-이 갖는 효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잘 편곡된 관현악처럼 울려퍼지는 공격이 몇 년 이어지면 일반대중은 그 논리에 은근히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이런 비판론의 상당수는 ‘부분적으로는 정확할 지 모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확실히 교사들 중 소수는 가르치는 일을 많은 휴가와 자유로운 시간(여름 방학)을 얻을 수 있는 직업으로 단순하게 취급하기도 한다. 학부모와 지역 사회는 자기 자식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버젓한 직업을 얻게 될 수나 있을지 걱정할 권리는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권리주장에는 타당성이 있다. 갑자기 과열된 경기가 수백만의 사람들을 그 흐름에서 지체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한편, 새롭게 창출되고 있는 많은 직업들에서만 (직업에 대한) 기대를 충족할 수 있고 안전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기에는 특히나 그렇다.(Apple, 1996) (학교는 이것과 거의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물론, 이런 운동에 기름을 부은 것은 교사에 대한 불만 말고도 또 있다. Educating rhe 'right' way(Apple, 근간) 에서 지적했듯이, 사람들은 공립학교를 ‘극도로 위험한 장소’로 본다.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공립학교들은 인간의 영혼을 위협하는 제도였다. 유혹과 불경(무신론)은 공립학교 곳곳에 존재했다. 신의 진리(절대진리)는 교육과정에서 삭제되었고 신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이제 (학교에서) 예배를 보거나 기도 드리는 것은 불법행위가 되어버렸고, 성서적 사실에 자신의 생활을 속박시키는 행위들은 전부 비정상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사태는 그러한 손실과 단절되고 있다는 기분이 만들어내는 강한 거부감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렇게 구성된 감정 안으로 압도적인 힘을 가진 요소가 비집고 들어왔다. 공립학교가 너무나 강한 위협에 맞닥뜨려 있는 것으로 여기는 부모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공립학교는 온통 위험 투성이이다. 아니 그 자체가 위험물이다.; 즉, 공립학교들은 바로 아이들의 생명(삶)을 위협하는 물리적인 위험들로 가득찬 듯이 비춰진다. 미국에서 대거 발생한 학교 총기난사사건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에 대해 품는 불안감을 크게 증폭시켰다. 흔히 빈곤층이나 유색인종 아이들이 연루돼 있는, 학교 폭력에 대한 이야기들(폭력이 학교를 지배하고 있다)은 보수적인 부모들 사이에서 ‘반학교 정서’를 이미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는 황폐한 도시 학교에서가 아니라 도시를 탈출한 사람들로 덩치가 불어난 교외지역 학교에서까지 총기 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사태를 악화시켰다. 교외지역의 부유층 자식들이 다니는 학교조차도 위험한 장소라면, 이제 유일하게 남은 안전지대는 <요새화된 자기 집 뿐>이다.

그러나, 공포가 제아무리 강하든 혹은 근거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신의 행위 선택을 뒷받침해주는 자원을 어느 정도는 확보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두려운 요소들에 대응하여 행위를 취하게 된다. 이것(자원 확보와 행위 선택)은 중요한데도 거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부모들의 홈스쿨링 참여를 쉽게 해주는 도구(수단, 방편)에 대한 접근가능성이 넓게 열렸다는 사실이 홈스쿨링의 성장을 부추겼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인터넷이다.(Bromley와 Apple, 1998을 볼 것) 조언 및 기술적, 정서적 지원을 제공하는 웹싸이트가 여럿 있는데, 그런 싸이트에서는 홈스쿨러들의 성공담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일반적인 보수적 복음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홈스쿨러들 가운데 컴퓨터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이전보다 더 불어났다는 사실은 대규모의 반-학교 계획(전략)에서 이전의 홈스쿨링운동 시절보다 유연하고 역동적인 방식으로 경제적 자본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웹을 활용하여 홈스쿨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그런 싸이트에 올라온 내용을 보는 것은 유용하다. 포틀랜드에 근거지를 둔 The Teaching Home이라는 싸이트를 보겠다. 이 싸이트는 홈스쿨을 하고 싶어하는 보수성향의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중심적 자원 중 하나이다. 이 웹싸이트 상에 ‘왜 홈스쿨을 하는가?’라는 문제를 개괄적으로 서술한 글이 올려진 후에 여러가지 답글이 올라왔다 :



“가족에 대한 주님의 뜻이라는 믿음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집에서 교육시키는 일에 헌신한다. 이들은 자기 자식의 사회적 학문적 복지후생은 물론 영적인 도야와 성격 발달을 염려한다.”



장점으로 열거된 것 중 몇 가지를 추려보면 :

“부모들은 모든 학습 내용들을 성서적 관점에 기초하여 제공할 수 있다. 그리고 정신도야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주님에 대한 외경심은 지혜(학문)의 시초이며 신성한 존재에 대한 앎은 이해하고 있음을 뜻한다.”

“홈스쿨링은 통합적인 방법으로 곳곳에서 아동을 훈련(도야), 감화시키는데 유용한 훌륭한 시간을 만든다.”

“각각의 아동은 개별적인 배려를 받으며, 아동 하나하나의 독특한 욕구에 맞출 수 있다.”

“부모들은 해로운 영향들, 이를테면, 갖가지 유혹들, 잘못된 가르침들(세속적인 휴머니즘과 New Age 운동이 발휘하는 비기독교적(occult) 영향들을 포함하여), 부정적인 또래 집단이 주는 압력, 그리고 위험한 주변환경들을 통제할 수 있다.”

“아이들은 부모를 교사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갖는다.”

“가족은 화합, 친밀을 경험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가운데 서로서로 기쁨을 나누는 경험을 갖는다.”

“아이들은 자신감을 기를 수 있고, 동료가 주는 순응 압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사고가 발달된다.”

“아이들은 새로운 관심거리들을 탐구하고 생각할 시간을 가진다.”

“다른 연령 집단과 소통할 기회가 늘어난다.”

“개별지도식 교육은 아동마다 잠재되어 있는 나름의 무궁무진한 교육적 가능성을 성취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계획을 함에 있어서 유연하기 때문에 부모의 일과 휴가 시간에 맞춰 융통성있게 조절할 수 있으며, 여러가지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시간에 쫒길 일이 없다.”



이 답변들은 통상적으로 홈스쿨링 옹호자들-특히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판에 박힌 이유들보다 훨씬 폭이 넓다. 자기 자녀가 탐구하고, 풍부한 잠재력을 성취하고,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를 바란다는데 촛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다양한 장점을 열거하는 이 리스트 속에는 지도적 위치에 서있는 특정 테마가 있다. 성서적 권위가 맨 꼭대기에 있으며, ‘신에 대한 경외심’과 연결된 지식과 이해가 더불어 있다. ‘진정한’ 지식은 신성한 존재가 명한 바를 근거로 한다. 부모의 역할은 넓게는 일종의 ‘훈련’이고, 모든 곳에서 자기 자녀에게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세속사회의 영향으로부터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가정/가족은 순결(신성)하다 ; 나머지 세계 - 세속적 인본주의, 또래들, 대중 문화 - 는 오염, 유혹, 위험의 존재 형식이다. 남성 대명사가 두루 쓰이는 것은 하나님이 선택한 가정의 지도자인 남성에 대해 주하나님이 가진 바램을 나타낸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표현된 부모의 관심요소들을 무시하는 구실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자기 자녀의 미래와 인생에 대해 깊이 걱정하며,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가족 구성원의 한 사람이기도 한 아이를 배려해주는 환경이 존재했으면 하는 바램이 강하다. 이런 바램 속에는 매우 긍정적인 점도 있다. 계속 변화하는 종교, 정치적 정서들을 가진 여러 집단들이, ‘이 사회는 아이들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고 있다’, ‘아이들을 보면서 돈벌 궁리나 하는 사람들에게 아이들은 단순히 소비자로만 보일 뿐이다’, ‘우리의 주요 제도들(학교)은 응당 그래야 하는 수준보다 (요구나 변화에 대한) 반응이 둔하다’, ‘긍정성도 있지만 부정성이 만만치 않은 대중문화의 구성요소들이 학교에도 있다’는 걱정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런 정서들은 모조리 홈스쿨러들의 중심적인 관심사들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만으로도, 좌파 그리고 우파 - 이를테면, 내가 앞에서 논의해온 홈스쿨러들 같은 - 양쪽 모두가 국가를 놓고 가하는 비판 속에는 좋은 ‘의미sense'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교육, 사회 복지 등등에 있어서 전문성을 보유한 사람들만이 공식적 권위를 가진다는 점을 자주 당연시해왔다. 이것은 과도한 관료화로 나아갔다. 그리고, 국가는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사회이동과 위치 보장을 추구하는데 국가를 이용해온 신 중간 계급 내 특정 분파의 식민지처럼 되어버렸다.(부르디외, 1996) 일부 학교는 소외와 무가치, 폭력-‘대중’ 매체에서나 등장하는 ‘비현실적 해결’ 방법-이 만연한 위험한 곳이 되어왔다. 그러나,

첫째, 지나친 관료화와 선택과 요구에 대한 무반응 등이 역사적 경향으로서 국가 안에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

둘째, 학교와 같은 공공 제도(기구)들과 공적 통제를 싸그리 폐기하는 것.

이 둘은 같은 소리가 아니다. 이것은 cocooning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이룩해 낸 성과들을 위협하며,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를 공교육(학교)의 해체(붕괴)는 이들에게는 거의 재난이나 다름없다. 마지막 절에서 이것을 다루려고 한다.



공public과 사private

국가에 대한 공격과 홈스쿨링을 지향하는 운동에서의 최대 수혜자(수익자)가 누구냐는 의문을 품었다면 이를 관계 속에서 사고할 필요가 있다. 혹시나, 어떤 집단이 이득을 얻는 대신에 다른 집단-특히 문화적, 경제적으로 억압받는 위치에 있는 집단들-은 희생을 치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뒤에서 서술하겠지만, 홈스쿨링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결코 노파심에서 나온 우려 때문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재분배의 정치학과 인정(recognition)의 정치학을 구별하는 것이 논의에 도움이 된다. 전자 즉 재분배 정치학의 주요 관심사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다. 재분배의 정치학에서는 사회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들어내는 주범이라고 본다. 우선, 이런 시스템은 사회의 특정 집단을 착취(노동의 결과물이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다른 사람의 이익으로 전유되는 것)하고(혹은) 그들을 경제적으로 주변화(임노동자들에게 노동에 대한 불충분한 보수와 바람직하지 않는 직업이라는 제약을 가하며, 이들이 더 나은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직업으로의 실질적인 진출가능성을 구속)시키는 조건을 창출한다. 그리고/ 혹은 계속되는 박탈로 인해 궁핍(이들은 항상 표준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물적 토대를 제공받지 못함)을 겪어야 하는 조건을 정치-경제 시스템이 만들어 낸다. 이러한 (착취, 주변화, 박탈 등으로 표현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과연 공정한 사회인지, 그리고 동질적이라고 일컫는 집단이 물질적인 부에 있어서도 정말로 평등한지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졌다.(Fraser, 1997, p.13)

두 번째 역동(인정, recognition)은 현실 세계에서는 이따금 재분배와 관련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나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힘의 관계에 있어서도 재분배의 정치학과는 구별된다. 인정의 역동은 문화-상징(symbols)의 정치학과 관계가 있다. 인정의 경우에 있어서, 한 사회가 갖고 있는 표상과 해석의 유형(pattern) 속에 불평등이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문화적 지배(자신에게 굉장히 낯설고 심지어 적대적으로 느껴지는 패턴의 해석이라든가 문화적 표현들에 끊임없이 종속되는 것), 불인정(nonrecognition)(사회에서 지배문화 안에는 들어갈 수도 없는 것), 그리고 멸시(disrespect)(아주 관습적으로 정형화당하거나 대중매체, 학교, 정부정책 내지는 일상 생활 속에서 공공연히 중상모략 당하는 것) 등이 여기에 포함되는 예들이다. 인정의 정치학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이러한 쟁점들은 많은 홈스쿨러들이 불평등에 대해 느끼는 의미와 그들이 가진 정체성(identities)에 있어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사실, 이러한 쟁점들은 공립학교 교육에 대한 비판, 더불어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자신의 자녀들을 가르치도록 해달라는 홈스쿨러들의 요구에도 체계적인 틀을 제공한다.

불평등의 두 가지 형태(재분배와 인정) 모두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를 만족시킴으로써 다른 하나를 악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자리잡다고 있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대목이다. 즉, 어떤 집단(이를테면,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이 인정에 깊이 박혀 있는 불평등을 보상해 달라는 요구에 응하는 것으로 인해 다른 집단- 특히 이런 것의 영향에 취약한 집단-이 착취, 경제적 주변화, 그리고 박탈로 이르게 되는 조건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불행하게도, 홈스쿨링에는 이런 종류의 부정적 효과를 유발할 가능성이 내재해 있을지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홈스쿨링이 가져올 만한 효과를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우리들이 한창 깨닫기 시작한) 교육에 대해 미칠 일반적인 영향과 따로 떼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Whitty 등이 수행한 바우쳐 프로그램 및 학교 선택제에 대한 국가간 비교검토 연구에서도 나타나듯이, 계급과 인종의 전통적 위계 관계를 재생산해내는 것이 그러한 정책들이 갖는 숨은 효과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서, 그러한 정책 프로그램들은 명백히, 이미 경제적 문화적 자본을 소유한 결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많은 이익을 획득해온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권력의 계층화가 거의 모든 사회경제적 영역에서의 불평등을 생산해내는 방식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Whitty et al, 1998) 민영화되고 시장화된 교육기관에 자녀를 보내는 선택을 취해온 사람들 사이에게 점차 늘어나고 있는 반조세운동 그리고, 홈스쿨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아이들’의 학교교육을 지원하는데 세금을 내고 싶어하지 않는 현상은 학교교육을 포함한 공공 제도에 대해 확대되고 있는 보수주의적 비판이 가져온 숨은 효과 중 하나이다.(Apple, 1996)

이것이 가져온 훨씬 광범위한 결과들이 차츰 명백해지고 있다. - 학교교육, 공공서비스, 보건의료, 그리고 경제적 탈구(dislocation)와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인구층(대체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장 많이 겪는 농촌, 도시 인구들)을 ‘공적’ 지원 하는데 필요한 조세 기반의 쇠퇴가 미국 사회를 심각한 고민에 빠뜨린다. 그래서, 인정의 정치학-나의 정체성과 내가 가진 필요를 토대로 내 자식을 위한 ‘선택’을 보장받고 싶다-은 재분배의 정치학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해왔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 만일 교육시장의 출현이 가장 유리한 환경에 있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시종일관 이익을 제공하면서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혹은 피부색 때문에 불리한 위치에 있는 학부모와 학생은 시종일관 혜택을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라면(Whitty et al, 1998 ; Lauder & Hughes, 1999), 우리는 홈스쿨링의 증대가 가진 숨은 효과를 재분배 정치학의 견지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대대적으로 선전된 여타의 수많은 ‘선택’ 프로그램이 했었고, 또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홈스쿨링의 경우에도 사회정의는 쇠퇴하게 될까?

이러한 효과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몇몇 주에서 <홈스쿨링의 확대와 함께 사회정의가 쇠퇴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증거가 있다. 교육재정을 종교적 목적에 사용하는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은 어떤 ‘틈새’-특정 집단에게만 도움이 되는-가 교묘히 조작됨으로써 무산되어 버리기도 하는데, 이는 홈스쿨링 확대가 사회정의의 쇠퇴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적당한 사례이다. 종교적 동기가 강한 홈스쿨러들은 공공재정을 사적인 목적을 위해 (부당하게) 사용하는 데에 널리 관여한다. 이는 잘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도 이루어지지만, 많은 교육구들이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을 때는 경제자원의 고갈원인에 대해 심각하게 항의를 해서 이를 유도한다.

이에 대해 좀더 언급해보자. 왜냐하면 이것은 내가 펼치는 주장 즉, 몇몇 집단(말하자면, 홈스쿨러들)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이 얻은 이득이 결정적으로 다른 영역, 이를테면 재분배의 정치학에서는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에서는 차터스쿨이 <홈스쿨러들을 위한 공적 재원을 늘리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 최근의 한 조사에 따르면, 차터스쿨의 50%가 홈스쿨러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다고 한다. ‘Independent Study'라는 차터스쿨(컴퓨터통신망으로 연결된 홈스쿨링의 익명)은 학교구들과 학부모들이 재원을 얻는데 사용되어 왔다. 이런 식이 아니고서는 얻기 힘든 재원을 그들은 그렇게 얻었다. 이는 차터스쿨의 ’법률상 인정‘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학교구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이런 돈은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홈스쿨로 데려가버리면 날아가 버렸을 돈이다. 반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것만이 아니다. 다른 사례들을 보면, 학부모들은 Independent Study같은 차터스쿨 등록비로 받은 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였다. 구체적으로, 학부모들은 그 돈을 Bob Jones 대학 - 미국 전체에서 가장 보수적인 종교학교 중 하나 - 이 직접 제작, 출판한 종교교재를 구입하는데 사용하였다.

편파성을 띤 교재를 사는 데에 공공재정을 드러내놓고 쓰는 것은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차터스쿨이 법적으로 인정받았다는 방패막을 내세워 (홈스쿨에서는) 종교 교재를 사는데 공공재정을 사용한다. 그러나 공립학교에서 사용되는 교재 즉 내용과 가격 면에서 공적 책임이 있는 공립학교 교재의 경우와 달리, 홈스쿨링에서 구입하는 교재는 공적 책무성에 대한 부담을 조금도 갖지 않는다. 이것은 홈스쿨러들에게 선택권을 상당히 인정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홈스쿨러들은 ‘인정의 정치학’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다. 반면, 그것은 가정용 컴퓨터를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없는 학생들의 돈을 빼앗아 가는 것은 물론, 지역 사회 내의 아이들이 그들 자신 및 지역의 문화와 역사, 가치 등에 관해 무엇을 배울 것인지에 대해 말을 꺼내기도 어렵게 만든다. 근본주의적인 색채의 종교학교에서 사용하는 교과서들이 ‘특정 종교(이를테면 이슬람교)는 잘못된 종교’라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다수의 시민들이 저열하다’는 식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만일 사실이라면, 공적 책임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내용(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을 가르치는 데에 공적 재원을 사용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지 심각한 의문이 떠오른다.

돈과 교육과정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홈스쿨링을 지원하는데 쓰이는 돈은 재정 압박에 시달리는 학교구들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더불어, 종교적 동기 때문에 모인 집단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 강화하는 교재를 사는 데 공적 재원을 지출하며, 이들은 어떠한 책무성도 “없는” 일반인들이다. 심한 경우, 이러한 교재들에는 미국 내에서 빠른 속도로 발전한 (외래) 종교, 이를 테면 이슬람교를 사회적 혹은 법적으로 승인해달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방식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쟁점으로 연결된다.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의 인정 요구가 그들이 행하는 차별적인 교육을 뒷받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의미라면 과연 그들이 재정지원을 받는 게 옳은가?

여기에서 나는 모두 다 반대하려는 건 아니다. 이건 사실 까다로운 논쟁거리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문화와 가치가 경청되지 않는다는 홈스쿨러들의 우려는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공론화되어야 한다. 공적 제도에서 자신들의 문화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함을 홈스쿨러들 스스로가 느끼므로 종교적 동기가 강한 홈스쿨러들이 내세우는 인정의 정치학을 지지해야 한다는 단순한 언명 속에 이 복잡한 문제가 묻혀버리는 건 곤란하다. 아주 최소한, 공공선에 닥칠 수 있는 위험을 인식하는 정도는 필요하다.





결론

이 글의 목적은 홈스쿨링 운동의 겉모습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경제, 사회,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경향들에 관한 여러가지 비판적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 있었다. 홈스쿨링 운동을 더 넓은 사회의 변동 내에 자리매김하여 파악하고자 시도해보았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은 이러한 변동들이 공동체의식, 공적 영역의 건강성, 그리고 경제 및 인종에 따른 계층화가 좀더 해소된 사회로 만들어나가려는 우리들의 실천에 매우 부정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리라고 판단한다. 홈스쿨링 운동에게서 볼 수 있는 ‘cocooning’에 대한 몰두, 국가에 대한 공격, 공적 책무성 없이 사용하는 공공재정 증가가 갖는 영향을 논쟁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해왔다. 그러나, 나는 홈스쿨링 운동에 분명히 긍정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를테면, 너무 많은 공공제도가 안고 있는 관료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라든가 관리적(통제,개입) 마인드를 가진 국가에 대한 우려, 그리고 자녀 교육에 대한 적극적인 헌신 등이 홈스쿨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라고 본다.

자기 본위적이고 공공성에 반하는 의제들은 관련 학부모와 지역사회 구성원들을 다시 부흥하고 있는 보수주의와 손잡게 만들었으며, 위에서 제시한 긍정적인 요소들은 이런 자기 본위적이고 공공성에 반하는 의제들과 뒤섞여 있는 상태다. 이 중에서 긍정적인 요소들만 가려 뽑는 것이 과제이다. 제도교육(공립 학교)은 학부모들이 가진 불만(홈스쿨러들의 그것과 비슷한)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우리의 제도교육을 재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미 다른 지면을 통해 자세히 논의해온 대로, 공립학교들은 너무나 자주 보수주의의 문화, 정치적 운동과 애초에는 별 관련이 없는 학부모들을 이런 흐름과 결과적으로 가까워지게 만들고 있다. 민주적인 토론과 비판에 대해 침묵하거나 묵살하는 학교의 모습, 그리고 매우 둔하게 반응하거나 아예 반응조차 하지 않고, 방어적이기까지한 학교의 태도는 학부모들을 보수주의 쪽과 연결되게끔 자초하고 있다.(Apple, 1996) 물론, 이런 비판들은 타당성이 없을 때도 있으며, 혹은 비민주적인 의제들에 대한 정치적 목적 때문에 이런 비판이 나타날 때도 없지 않다.(Apple, 1999) 그렇다고는 해도 이를 사회적인 격론-공교육을 민주적으로 만들어야 하며 공교육이 민주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논쟁-에 대해 학교가 폐쇄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변명거리로 삼아서는 안된다.

학교민주화 운동이 증거하듯이, 이러한 부분에 정확하게 들어맞을 만한 모델들이 있다.(Apple & Beane, 1995, 1999) 지나치게 낭만적이 되는 걸 경계하는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교육과정과 교수방법의 모델을 바탕으로 한 학교는 존재한다. 지역사회의 정서와 관계가 있으면서도 보다 넓은 사회의 정의와 공정에 대한 책임을 자임하며, 교사와 학생 모두 학교에 있고 싶어하는 교육과정과 교수방법의 예는 실제로 있다. 만일 학교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대다수 학부모들은 반-학교 정서 쪽으로 기울 것이다. 이는 공교육 체제 및 공동체성 - 이미 위축된 상태에서 점점 심한 위기에 몰리고 있는 - 모두에게 있어서 비극이다. 공립 학교들(국가지원을 받는 학교들)이 강력한 사회 분업관계를 재생산하는 장소로서 기여해 왔을 지라도, 적어도 미국내의 공립 학교들은 민주주의 투쟁의 가능성을 보호하는 장소이자 집단적 행동을 동원하는 강력한 장소로서 기여해오기도 했다.(Hogan, !983 ; Reese, 1986) 아직 공공 영역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제도 중 하나인 공립학교에 대한 투쟁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분명 양쪽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하는 줄타기 같은 문제이다. 공공제도가 수행하는 기능에 대한 엄격한 비판을 가하는 동시에 진정한 공공제도에 대한 비전도 유지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국에서는, Democratic Schools에 관여했던 비판적 교육자들과 NCEA(National Coalition of Education Activists)가 과제로 설정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이다.(Apple & Beane, 1995, 1999) 이들은, 학교는 서로 상충되는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압력을 받고 있으며, 보수적 현대화 시기에는 특히 더 그렇다는 것을 인식해왔다. 부분적으로나마 성공을 거두었던 이전의 투쟁에서 얻은 공통의 유산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러한 모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몽상은 아니다. (학교와 같은) 공공 제도 안에 대항헤게모니 행위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목적을 두는 개혁 - 필자가 ‘비혁신주의자의 개혁’이라고 불러온 것- 에 관여하는 것을 비현실적이라고 일축할 수는 없다.(Apple, 1995) 더욱이, 이를 위해서는, 공적 영역의 공공성을 지켜낼 필요가 있다.



Raymond Williams - 스스로를 어떤 환상도 가지지 않은 낙관주의자라고 여기는 - 가 이를 가장 잘 표현했는데, 그는 의미와 가치들, 즉 우리네의 사회 생활을 이끄는 의미와 가치들이 상호결정되는 것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스스로가 ‘장구한 혁명’에 참여한다고 표현한 것 중에, 기억할 만한 문구가 있다. ‘희망이 우리 앞에 놓인 위험의 본성을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면, 우리는 희망을 지켜내야만 한다’(Williams, 1989, p.332) 우리가 알다시피 제도교육 내에서, 비슷한 부류들은 비슷한 위험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중심으로 사적영역에서 모색하는 대안들은 이(제도교육 내의 위험)보다 훨씬 더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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